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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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서 시집 못 보낼 것 같다고 했더니 간호사가 손뼉을 치더라. 인생 말아먹는 게 결혼인데 돈 있다고 결혼하면 돈까지 날려 먹지 않겠냐고. 맞는 말이여. 안 조질 인생도 사람 잘못 만나면 조지고, 조질 인생에 멀쩡한 인간 만나면 걔까지 조져. 특히 너는......." - P203

한번 시작된 의심은 점점 사방으로 촉수를 뻗어 나갔다. 악마가우리집에 온건, 정말 집이 넓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을까? 너는 온갖 감정을 탐내잖아. 악마가 사람 사이의 싸움을 간식 삼을수 있다면 불행 역시 달콤할 텐데, 할머니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네 즐거움은 아니었을까. - P222

"왜 당신이 나로 인한 행복을 두려워했는지, 조금 늦게 깨달았어요. 처음에는 당신이 나를 오해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그게가장 큰 문제는 아니더라고요"
남자들은 두 번째 방을 열었다. 악마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베풀 때도, 고통을 줄 때도 저는 소모되지 않았죠. 그런 존재는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피상적인 천국이거나 지옥이며,
오직 경배 또는 두려움을 받을 수 있을 뿐"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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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결혼 비밀보다는, 이 결혼을 지지해주기 위해 아빠가 자신과 동성 커플의 공통점을 찾아서 해줄 말을 열심히 골랐다는 점에 놀랐다. 정말 맞는말이기도 했다. 동성동본 혼인 금지, 호주제와 같이 지켜야만 할절대적 가치로 보였던 일들이 2, 30년이 지난 지금은 정말 별것도아니지 않나. 우리의 결혼도 30년 뒤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니, 결혼 승낙 발언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말이었다. - P104

"부장님, 첨부한 도표와 같이 각종 혼인 관련 혜택 적용 여부를인사팀에 문의하려고 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게 무슨 얘기지. 큰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인가? 조금 서운한마음이 들려는 찰나, 부장님이 말을 이어갔다.
"청첩장만 첨부하라고 규정에 적혀 있는데 규진이라고 굳이 따로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승인할 테니까, 기안하세요."
순간 울컥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남들이상으로 증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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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 얘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뜨기도 했고, KBS 9시 뉴스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제 다음에는 뭘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글쎄요…………. 일단 내일 출근하겠죠?"
나는 차별을 뿌리 뽑을 히어로가 아니고, 여전히 매일 출퇴근을해야 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하필 동성애자다 보니 많이들 하는 결혼 좀 했다고 방송을 탔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도 분명히 있다. 성미산학교의 남학생에게 내가 했던 답변은 매일매일 구체적이고작은 승리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당장 거대한 악을 내가 직접모두 물리칠 수는 없겠지만 하루하루 작은 차별과 혐오와는 싸워나갈 수 있다. 국가에 소송을 거는 건 무섭지만 회사에 신혼여행휴가를 요청하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처럼. - P9

그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은 싸움을 이겨내고승리했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렇게 해보니 되더라고동성애자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그리고 언젠가 성미산학교의남학생과 웃으며, 세상이 변하긴 변하더라, 살다 보니 달라지더라는 얘기를 나누고 싶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동화 속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아니더라도, 레즈비언 할머니 부부는 드디어건강보험료를 같이 낼 수 있게 됐다는 해피엔딩이면 좋겠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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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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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선우를 잃어버린 피해자가 아니었다. 선우가 당연하게 받았어야 할 사랑과 평안한 일상을 빼앗은 가해자였다. - P70

선준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선우를 보았다. 살짝 벌어지던 선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다시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입을 열었을 때 아이의 꾹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악귀야...……. 날 만나면 엄마 아빠가………… 죽어."
"무슨소리야!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선우야!"
예원이 선우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선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노로 몸이 떨렸다. 늘 의문이었다. 전화번호며 주소를 모두알고 있는 영특한 아이가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원인이 이것이었다. 아이가 스스로 부모를 찾지 못하게 세뇌시킨 것이다. 아이의 영혼까지 옭아맨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 P236

그의 아내도 그랬다. 아이를 처음 낳고 모든 것이 생소했다. 그녀도 아이의 엄마가 되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낯설 수밖에 없었고, 실수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완벽한 모정을 당연하게 강요받았다. 화는 낼 수 있지만, 화풀이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검열했다. 아이를혼내고도 단순히 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교육 때문이었는지를계산하며 남몰래 괴로워했다. 손…………. 절벽 앞에 선 상황이라면손을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다시 아이에게로 갔다. 그사이 유괴가 벌어진 것은 지독한 불운이었다. - P255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는 아이가 죽었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 자살하지 않으니까요." - P258

선우가 사용하던 물건은 단 하나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선우의 나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시트를 제거했다. 선우가 돌아올 자리를 마련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던 차가운 주차장을 기억한다. 만약 선우가 있었다면, 이제 너무 커서 시트가 필요 없게 됐음을 기뻐하며 떼어냈을 것이다. 그들은 선우만을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울고 웃었을 부모의 시간과 추억마저 빼앗은 것이었다. - P272

모든 문제는 단 한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쌓이고 쌓여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잘못된 정거장에도착해 있는 것이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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