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때 그것은 당신의 오해이며, 나는 정당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고, 옳은 일을 했다고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삶이다. 그 ‘오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전혀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저 힐난일지라도 흥분하지 않고 점잖게 ‘설명‘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피해망상‘이라든가 ‘예민‘이라는 말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경험과 감정은 자꾸 공적인 논의에는 포함될 수없는 주관적이고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 P107
‘도움받은 주제에 불평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도움 안 받고도 해낼 수 있으니까 계속 불평할 거야"라고 쏘아붙이고 싶을 때도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해명이 전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해명하는 순간 나는 자연스레 ‘도움받는 이들은 목소리 내지 말아야 한다‘라는 전제 위에서 말하게 된다. 나 역시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는 취약성으로부터 슬쩍 발을 빼는 셈이 될 뿐이다. 그 해명은 다시 내게로, 또 다른 이들에게로 돌아오는 화살이 된다. 여전히 해명해야 하는 이들은 생기고, 외려 나의 해명은 더한 책임을 지우는 일이다. 동조자가 되는 것이다. - P107
이름을 지은 연유도 별생각 없었다. 휠체어가 구르니까 ‘구르리‘라는 이름을 이미 오래 쓰고 있었기에 ‘리‘만 빼고 ‘님‘을 붙였다. 좋은 선택이었다. 악플을 다는사람들도 구르님이라고 존대하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11
그래서 누구나 연대와 공감이 가능한 영상이라는 이유를꺼내온다. ‘장애이해교육‘ 수업에서 틀어주는, 장애학생은 볼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한 듯한 극적 서사 드라마 말고, 장애인의 어려움을 부각시켜 보기만 해도 심장이 조이는 실험 카메라 말고, 그냥 우리 얘기.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빡치고, 또때로는 재미있는 그냥 경험. 잔잔하고 사소한 장애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별일 아닌 이야기가 궁금해서,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 영상을 만든다. 그것뿐이다. - P116
나는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은 이들이 극적인 슬픔으로만 소비되지 않길 바란다. 장애와 함께 살아가며 당혹과 수치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삶은 누군가에게보여주고 그에게 삶의 힘을 얻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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