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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뜯어 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 게 인간 아닌가." (p323)
주인공 헌은 딸을 잃은 소설가이다. 헌은 형제로부터 엄마가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며 J시의 고향집에 아버지 혼자 남게 되자 아버지가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 때문에 그동안 외면했던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오랜만에 J시로 내려간다.
치과 치료 때문에 음식을 잘 씹지 못하는 아버지를 돌보며 헌은 아버지의 새삼스러운 모습을 목격한다. 기억이 자주 어긋하고, 밤마다 사라지는 아버지. 헌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수면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과 쓰지도 않을 물건을 잔뜩 사서 폐가 창고에 쌓아두고 있다는 것, 아버지 삶에서 너무나 강렬한 흔적을 남긴 두 사람- 김순옥과 박무릉-의 존재도 알게 된다. 아버지에게는 어떤 마음의 병이 있는 걸까?
헌의 기억 속 아버지는 농사에 전념하기보다는 돈을 벌러 이따금 집을 나갔던, 전혀 농사꾼 같지 않은 농부였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희생하는 가족 구성원 내 역할로서의 아버지가 그동안 인식하고 있던 아버지의 존재였다면, 약해지고 허름해진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며 헌은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본다.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p197)
14세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일찍 가장이 되어야 했던 아버지의 삶은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손가락은 집안의 가장이 전쟁에 징집되서는 안된다는 염려에 잘려 나갔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악착같은 마음은 자신에게 배움의 희열을 알려주고,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준 소중한 동무 박무릉을 절벽에서 밀어버려야 했던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게 했다.
그에게도 자신의 마음가는대로 살고 싶은 바람이 든 적이 있었다. 서울에 돈을 벌러 가서 만난 갈치조림 집 딸 김순옥. 집을 나가 김순옥과 잠시 살았던 아버지에게 그녀는 어떤 의미였을지 아버지 자신의 목소리로 드러나지 않지만, 금지된 개별자로서의 삶이 아니었을까. 죄책감도, 사랑이란 감정도 자식을 부양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의무 앞에서 잘려나가서 아버지는 잠들지 못하고 계속 깨어있는 뇌로 숨고, 눈물을 흘렸던 건 아닐까.
이 의무감에 대한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고백처럼 젊은 날에 우리들의 먹성이 무서웠다고 한 말은 내겐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아버지의 청년 시절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염병으로 이틀 사이에 부모를 잃은 마음을, 전쟁을 겪을 때의 마음을, 얼굴 한번 보고 엄마와 결혼할 때의 마음을, 큰 오빠가 태어났을 때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나를. 짐작이 되지 않았다." (p197)
"아버지는 손톱도 없이 뭉툭한 자신의 손가락을 잠깐 바라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다, 이런 것은... 이라고. 눈을 가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손가락을 잃은 후부터 그 일이 아무렇지 않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아버지가 치러냈을 것인지."
하지만 아버지는 전쟁과 가난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그 많은 일을 치러내고도 모진 세월을 '아무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 익명의 아버지 '가슴에 잠겨 있는 고통과 침묵의 말들을 호호 불어서라도 건져 올려' 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문학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애틋한 존재이거나 내 자아를 억압하는 권위적 존재로 그려졌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아버지는 '익숙한 듯'하면서 '처음 보는' 모습일 것이다.
소설 속 아버지는 표면적으로는 자식 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촌부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개별적 인간으로의 욕망을 깊숙이 감추고 있다. 배우고 싶은 것도, 책임감에서 벗어나 떠나보고 싶은 마음도 많았던 하나의 인간.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스스로 집어삼킨 고통과 숱한 감정들이 뒤늦게 병으로 발현되어버린, 안쓰러운 사람.
신경숙의 문체는 어딘가 애틋한 데가 있어 나에게 없는 어느 먼지 쌓인 추억을 탈탈 털어 앞에 가져다 주며 나도 모를 슬픔에 젖어들게 만든다. 이번 소설도 그러했다.
<엄마를 부탁해>에 이어 아버지의 생을 그려낸 이 책의 띠지에는 '이 세상 익명의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신경숙의 찬란한 헌사'라는 말이 적혀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표절 사건 이후 절필을 하는 동안 자신이 겪었던 심리적 방황을 죽은 딸과 늙어가는 아버지와 J시에 이입한 것처럼 읽혔다.
죽은 것은 작가로서의 자신, 욕망을 삭힌 채 의무감에 살았던 아버지와 늙어가는 고향 J시는 문학과 낡았다고 지적 받는 한국 문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
작가의 말을 보면 이 소설은 꽤 많은 취재를 통해 진행된 것 같지만, 전북 정읍 태생인 작가가 전라도의 한 소도시 J시를 설정한 것과 주인공 헌이 소설가로 등장하는 것에서 자전적 소설인가 갸웃했다가 자신이 경험한 상실과 그럼에도 묵묵히 살아가야하는 현실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미쳤을 때는 일부러 자전적인 것처럼 꾸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나의 망상일까?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