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2권
굽시니스트 지음 / 애니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나왔다. 
소림, 화산, 무당, 아미, 개방 등의 무림 정파에서는 절대 인정 못 하는 무림 사파의 독수와도 같은 '서브컬처', '막장 패러디 만화', 오덕후 형님들의 절대 지존 굽시니스트의 본격 역사, 전쟁, 패러디 만화 <본격 제2차 세계대전>2권, 그 찬란한 세계대전의 완결편이 드디어 나왔다. 본격 1권이 세상에 자태를 드러낸지 1년여가 지났으니, 과연 1년간 갈고닦은 무공은 얼마나 될까? 몇 갑자의 무공증진을 이루고 다시 무림강호에 출정했을까, 호기심이 불끈하여 책을 펼쳐들었다. 

일단 '승리의 굽본좌'가 최근에 '시사IN'에 연재를 시작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전혀 안 그럴 것 같으나 굽시니스트는 본래부터 역사학도이자 장차 '선생님이 될 분'이라는 것도 밝혀둔다. 교단에 선 오덕들의 교주라니 언뜻 상상이 안 되긴 한다만, 굽시니스트는 '굽시니스트'이전에 '김선웅'이라는 '한글 이름을 가진', 장차 똘망똘망하거나 적당이 비뚤어지거나 적당히 담배를 태우며 야자를 제껴도 여전히 귀여운 아이들로부터 '김선웅 선생님'이라 불릴 사람임을 밝혀둔다. 

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니 당연히 한국 이름을 쓸 것이며, 선생님은 만화도 그리면 안 되느냐, 따질 분 있을 수 있겠다. 아, 고정하시고.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를 읽으신 독자라면 내 말뜻을 이해하리라 본다. 허무와 허탈과 박장대소와 실소 사이에서 종횡무진, 세계대전의 이면을 낱낱이 까발리는 B급 유머 속에서, 언뜻언뜻 빛나는 역사, 세계관의 해박함과 자기 철학을 접할 때면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지구인이 아닐거야!'란 생각이 자연스레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작가는 어쩌면 철수나 영희 다음으로 튀지 않는 '김선웅'이란 이름을 지닌 사람이고, 오덕들의 교주로 군림할 듯하나 후에 선생님으로서 교단에 설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중, 고등학교 남자 선생님'을 떠올릴 때 옵션처럼 따라붙는 '엄격함의 표본'과 '오덕들의 교주'라는 이미지는 참으로 까마귀와 까치 없는 견우와 직녀처럼 멀기만 하다. 하긴, B급 패러디에, 서브컬처의 대표주자 격으로 만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오덕들의 교주가 '시사IN'에 연재를 한다는 것도 작품과 그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놀랍긴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교과서는 시대를 역행하고 역사는 앞이 아니라 기어를 R에 놓은채 열심히 지난 세월로 후진하고 있다만, '시사IN'에 연재를 하는 이가 교단에 서서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게 될 거라니, 적어도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게 아닌가. 

 

자, 이제 '본격적'으로 본격 만화 얘기를 해보자. 왼쪽이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의 표지이고, 오른쪽은 2권, 완결편의 표지다.
개인적으로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의 표지 디자인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 뛰어든 각 나라의 국기를 배경으로, 히틀러가 지구 모양의 요요를 한 손가락에 걸고 있다. 요요놀이를 하는 듯도, 손가락으로 세계에 도전장, 내지는 선전포고를 한 듯 정면을 주시하는 히틀러의 모습. 약간은 희극지왕(주성치 말고) 찰리 채플린이 떠오르기도 하는, 수천 수만의 목숨을 담보로 미친 희극을 벌이는 듯도 하다. 패러디와 B급 유머를 실었으나 그 안에는 철학과 세계관을 단단한 뼈대로 세운 작품답게, 표지 디자인의 글씨체와 색감, 화면배치는 더이상 뺄 게 없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자리를 잡고 있다. 

표지의 은유와 철학적 상징성: ★  

그림과 글씨, 디자인적 요소의 조화: (별 다섯 개 만점 중)

그렇담 새로 나온 2권의 표지.  

걸그룹의 원조격이랄 수 있는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을 패러디했다.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은 초반에 제로센 전투기가 삽입된 디자인이 떠돌아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굽시니스트는 제로센과 나치 친위대를 패러디한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을 또 한 번 패러디한 셈이다. 어찌 보면 2차 세계대전을 그리는 만화이니, 제로센과 나치의 배열은 코스프레틱한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보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세계대전 만화에 더 잘 어울린다 볼 수 있다. 굽시니스트 쪽에서는 소녀시대의 앨범 재킷 이전에 '앨범 재킷으로 인한 파문에 가까운 수준의 소란'마저도 본인의 만화 작품 표지의 이면에 깔아넣은 듯하다. 20C를 뒤흔들고 세계 권력의 판도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세계대전마저도 핫팬츠를 입은 걸그룹의 앨범 재킷에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코스프레 수준으로 거론되는데, 굽시니스트는 전쟁광들의 희극지왕같은 전쟁질이야말로 권력이라는 미친 놀음의 코스프레에 재미를 붙인 자들의 마스터베이션 수준으로 희화화 시켰다.

표지의 은유와 철학적 상징성: ★ 
그림과 글씨, 디자인적 요소의 조화:

(1권의 패러디와 은유는 문학적이고 세련되기까지 한데 반해, 2권의 패러디는 조금 더 거칠고, 육덕지다. 뒤틀어 씹는 맛은 2권의 표지도 이루 말할 데 없으나, 1권의 패러디가 살롱에서 오고가는 시니컬한 비꼼이라면 2권은 포장마차에서 시뻘건 개불을 앞에 놓고 소줏잔을 쳐올려 대운하를 논하는 듯 거칠고 직접적이다. 완성도에 상하나 경중이 있는 게 아니라 직설과 은유의 차이랄까? 1권 표지 디자인이 워낙 완벽하기도 하고.)  
 

그렇담 내용은 어떨까? 
일단 2권은 1권에 비해 더 방대한 양의 사실과 의견을 집어넣느라 조금 빡빡한 게 사실이다. 1권은 허무개그와 온갖 패러디가 난무하며 개그적 성향이 강했는데 - 그로 인해 각주를 달아 '각 장면에 삽입된 패러디를 설명한' 분량도 상당했는데,- 2권은 역사와 전쟁의 종결 앞에 더 많은 이야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작가의 메시지가 늘어났다. 패러디는 여전하나, 패러디를 설명하는 부분이 줄었고 - 그래도 패러디는 여전해서, 자신의 매니아 지수를 측정해 볼 수 있다 - 그림에 비해 역사의 무게를 담아낸 텍스트의 무게가 상당하다.

표지 디자인의 문학적 은유와 깊이는 1권이 앞서나, 본문에 담긴 작가의 철학과 1년새 자란 생각은 오히려 2권이 더 무겁다고 봐야겠다. 가장 인상깊었던 장은 제14장 '동경과 남경' 편이다. 진주만 공습이나 세계 대전사의 굵직한 전쟁 신은 많은 글과 적당한 내용으로 굽신거리며 짧게 넘어간데 반해, 작가 굽시니스트는 '동경 폭격'과 '남경 대학살' 부분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자신의 철학과 고민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진중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머나먼 상공에서 단추 하나를 누름으로써 수많은 민간인을 불귀신으로 만들어버린 미국의 일본 본토 - 동경 - 폭격과, 전쟁에 미쳐가는 일본 군인들이 소총에 대검을 장착하여 남경의 민간인들을 칼로 쑤시고, 베고, 강간한 지옥도 풍경을 대비시키며 무엇이 정의인가, 승리자의 학살은 타당한가, 물리적으로 1m 앞에서 칼을 휘둘러 목숨을 앗아가고 강간하는 살육과, 직접적으로는 희생자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은 폭격의 살육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를 묻고 있다. 작가 굽시니스트의 정리를, 인용해본다. 
 

결국...
역사의 신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바른 대의를 위해 손을 더럽힌 쪽이 용서받는다. 
어떻게든 역사는 지나가고 도시는 다시 번영한다. 



만화가 굽시니스트가 결코 '만화를 잘 그리는 만화가'에 속하지는 않지만, 어찌보면 굽시니스트는 '강풀과'에 분류되는 만화가라 할 수 있겠다. 만화가 강풀은 최근에 미디어 다음에 연재하는 작품들에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작화 실력이 성장했음을 보여주었지만, 그렇게 성장했어도 여타 만화가 중에서 잘 그리는 축에 속하냐, 하면 아니올시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작가이다. 하지만 강풀이 짜내는 만화의 스토리와 얼개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만화 스토리 면에서는 만화가 강도하, 윤태호, 강풀이 최고 수준이라 생각하는데, 그중 대중성과 완성도 양 쪽을 겸비한 이는 강풀이 유일하다 하겠다. 물론 작화 실력에서는 강도하, 윤태호 작가를 강풀이 넘볼 수 없다지만, 그것은 차치하고. 

굽시니스트 역시 1년의 시간을 숙성의 시간으로, 겨울철 땅 속에 묻힌 김장독 속의 김치처럼 스스로를 발효시키며 지냈다지만, 작화 실력만 놓고 보자면 '천상 만화쟁이'로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를 논하는 그의 작품은, 아주 대중적이랄 수만은 없는, 오히려 골수 만화팬과 매니아들이 열광할 만한 B급 유머와 '일반인'은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패러디 천지라지만, 그가 역사와 세계를 논하는 서술의 밑바닥에 깔린 확고한 철학과 세계관은 대중 스토리에서 강풀 작가가 최고이듯 역사 패러디 물에서의 굽시니스트의 역량과 가능성에 기대를 걸기에 충분하다. <풀하우스>의 원수연 작가가 그랬다던가. 강풀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리면 안 된다고. 너무나도 뛰어난 그의 스토리라인이, 잘 그린 그림에 묻혀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던가. 어찌보면 굽시니스트의 약간은 허술해서 더 정이가는 그림은, 굽시니스트만의 세계관과 정치 철학을 부각시키고 드러내는 '아주 뛰어난 조연'을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판에서도 가끔은,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만. 
 

창비에서 '인문서'에 가까운 정치 만화, 역사 만화가 나왔었다. 뛰어난 작화 실력에 의식까지 갖춘 최규석 작가의 <100˚C>가 그것이다. 초기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느꼈던 작가인데, 창비에서 연달아 두 권의 만화집을 내며 확실한 자리매김을 보여주었다. <100˚C>는 6월 민주항쟁을 극화체로 다루고 있는 진중한 작품이다. 뒷부분에는 작품을 접할 청소년과 어른들을 위해 YMCA스러운 해설도 덧붙였는데, 어찌보면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와는 스타일에서 극한에 서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최규석 작가가 우리 정치사의 뜨거운 소재를 다루었듯 굽시니스트가 현 정권이 물러난 후 우리 나라의 정치사를 한번 다뤄주었음 하는 소망이 있다. 극화체의 진지한, 끓는점에서 단 1도가 모자란 우리 사회에서 1도를 더 보태 민주화의 열망이 끓어오르기를 기원하는 작품(백도씨!)가 있다면, 굽시니스트처럼 개불 앞에서 소줏잔을 쳐올리는 작품도 분명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이순신 장군 대신 세종대왕님이 굽어 살피시는 종로 한복판에, 하루아침에 산성이 쌓이고 청계천 마냥 4대강도 파헤쳐지는 이 시기, 한편에선 친일인명사전이 나오지만 한편에선 국민의 99%를 이루는 서민이 짓밟히는 이 세상을 굽시니스트가 통쾌하게 만화로 그려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제정신으로는 볼 수 없고, 현실이 패러디가 아닌가, 이건 믿을 수 없는 만화 한 판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이 세상을, 굽시니스트가 후련하고 통쾌한 B급 유머로 한바탕 신나게 패러디해 주면 좋겠다. 굽시니스트가 한국사를 그린다면, 돈 주고 사서 볼 1이 바로 나인데 말이다.

정리한다. 

굴곡진 역사를 판타지로, 때론 끝날 줄 모르는 입담으로 소개한 문학 작품으로 멀게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있고, 가깝게는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 있다.(차마 현실일까, 싶을 정도로 묘사되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악행이 나오는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언뜻 우리의 군인 출신 대통령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리고 만화로는 창비에서 나온 <100˚C>가 있다. 세 작품 다 진지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창비의 것은 창비에게, 애니북스의 것은 애니북스에게,
라 말하겠다. 

이미 지나간 20C의 전쟁을 패러디한 <본격 제2차 세계대전>을 읽으며 웃고 울었지만, 21C의 현실이 그때로부터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나, 어찌보면 배밀이을 마치고 갓 기어다니기 시작한 아이의 몸짓보다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니 어쩌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오히려 뒤로 퇴행한 것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세월이 계속 이와 같다면, 굽시니스트의 영광, 굽본좌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그의 작품 소재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므로.  

굽시가 통렬히 패러디할 한국사를 위해, 그 작품을 사기 위해 그 때까지 열심히 책값을 모아 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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