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봉우리 1
다니구치 지로 지음, 유메마쿠라 바쿠 원작 / 애니북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차피 내려올 거, 뭐하러 올라가나. 그저 산아래 시리도록 차가운 계곡물에 수박 한 통 동동 띄워놓고, 매기나 잡어 등 민물고기 넣고 끓인 매운탕에 소주 한잔 하고 후식으로 수박 먹고 내려오면 그게 산행이지. 뭐하러 비싼 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까지 날아가서 죽을지도 모르는 겨울산에 올라? 거 다 외화 낭비야. 산은 모름지기, 관광버스 대절해서 차 안에서 노래도 한 곡조씩 뽑고 쏘주도 나발 불어가며 처음보는 아줌마 손 맞잡고 부르스도 튕기고, 올라갈 땐 남이더라도 내려올 땐 '자기'나 '허니'가 되어 손 꼭잡고 내려오는 게 산 타는 맛 아닌가? 국내에서 돈 쓰니까 내수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하고 얼마나 좋아? 암, 그게 애국자의 자세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에베레스트에는 왜 가려고 하는가? 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 (Because it is there)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말한 이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불과 200여m 남겨둔 채 실종된, 그리고 실종 후 75년 만에 미라로 발견된 조지 맬러리다. 미라로 변해 버린 조지 맬러리의 시신은 아직도 에베레스트에 얼어붙어 있다. 제 한몸 가누기 힘든 설산에서 시신을 옮기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그저 유품을 정리하고 시신의 사진을 촬영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2005년 5월 18일,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중 조난당한 박무택 대장이 있다. 만년설의 반사광에 서서히 눈이 멀어가며, 한참 어린 후배 장민 대원에게 '자신을 버려 두고' 혼자 내려가길 종용한 산사람. 그리고 끝내 연락이 끊긴 그 둘을 구하기 위해 홀로 산에 오른 백준호 부대장이 있다. "여기가 8,700미터가 넘어서 구조가... 구조가 어렵습니다." 백준호 부대장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다들 왜 이렇게 미련한 것일까. 왜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를까? 그런데 이보다 더 미련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산악인 엄홍길. 어쩌면 힐러리보다 더 먼저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복'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조지 맬러리의 시신도 수습은 커녕 겨우 사진 촬영만 한 게 전부였는데, 산악인 엄홍길은 '무택이의 시신을 수습해 오겠다'며 산에 오른다. 다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미련한 것일까. 하지만 결국 엄홍길은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백준호 부대장, 장민 대원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음양사>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원작 <신들의 봉우리>를, <열네 살> <아버지>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극한의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경이로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만화에 담긴 산이 어떠한가는, 미련한 산사람 엄홍길의 말을 빌려보자. 

정복이란 말은 쓸 수 없다. 산이 잠시 내게 허락했을 뿐. 눈이 시리도록 생생한 산경의 묘사에 내 입에서 입김이 서려나오는 듯하다.
_ 산악인 엄홍길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등정)
 

산이 좋아 산으로 돌아간 '무택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에 오른 산악인 엄홍길, 그가 권하는 책. 과연 어떨까 싶어 펼쳐들었다. 과연, 다니구치 지로는 우직하다. 그의 펜은 정직하여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 산사람이 정상을 향해 아래가 아닌 위를 쳐다보며 올라가듯, 다니구치 지로의 펜은 가장 좋은 그림을 위해 그저 위를 쳐다보며 달려나간다. 원작자 유메마쿠라 바쿠 역시 자신의 쓴 글임에도 다니구치 지로에 의해 재탄생한 <신들의 봉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다니구치 지로의 산에 대한 묘사는 압도적이다. 고도감이 있으며, 무시무시하다. 작품이 완성되어 다니구치 지로판 <신들의 봉우리>를 읽을 때, 독자는 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국내에는 이제 겨우 소개되었지만 지면에 연재되어 먼저 작품을 접한 세계인들은, 2005년에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최우수 작화상을 수여함으로써 다니구치 지로가 창조한 산의 세계에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우려를 표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다. 원작이 있는 경우가 아닌 다니구치 지로가 글과 그림을 진행한 <열네 살> <아버지> 등을 보면 남성위주의 시선을 느낄 수 있고, 특히 <아버지>의 경우는 부자지간의 갈등과 해소가 주를 이루지만 아버지의 사라짐으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이나 여성의 상처는 전혀, 라고 할만큼 드러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뜨내기 남성들은 '여성'과 '산'을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를 몇 번째 올랐냐, 보다는 '처음 올랐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같은 산을 오르고 어느 여성을 '정복'하더라도 '초등정', '첫 번째 관계'를 남성들, 마초들은 더 중요시한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지만 누구도 밟지 못한 산 정상에 깃발을 꽂는 것'이야 말로 남성들이 들어찬 뒷골목에서의 음담패설 중 가장 영광스러운 정복기이자 명예로운 훈장이다. 그런데 남성의 시선을 지닌 이가 험산에 등정하는 거친 사내들의 이야기를 옮겼다니, 은연 중 마초가 미련스럽게 산을 기어오르는 만화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우려는, 기우라는 것을 밝힌다. 물론 <신들의 봉우리>에 중요한 여성 캐릭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고독하고 상처를 지닌 남성 캐릭터가 안식을 얻는 따뜻한 품, 정도랄까? 하지만 <신들의 봉우리>는 '남성'만화가 아니라 '인생' 만화 내지는 '사람의 만화'라 말하는 게 옳다. 왜 미련스럽게 산을 오르는지, 왜 산이 전부이며 자신의 증명이며 존재 가치인지가 은연중 드러나며 대비되는 캐릭터들이 있는데, 고독하고 마초 같으나 실은 그 안에 보듬어지지 못한 얼마나 여린 감성이 있는지, 연약한 존재가 웅크리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흑백으로 표현되는 극한의 상황, 극한의 작화 속에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자연 앞에서 왜소한 인간이 왜 자신의 전부를 걸어 산에 오르는지 감동 가득한 다큐멘터리로 담담하게, 때로는 손에 땀을 쥐게 표현하고 있다. 과연, 명불허전, 다니구치 지로다.



사랑하는 그녀가 떠났다. 결혼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녀는, 친구와 결혼하겠다고,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가 사랑한 '친구'는, 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무언가 스스로에게서 대답을 얻기 위해 카메라를 짊어지고 산으로 떠났으나 그의 앵글에 잡힌 것은 추락하는 두 명의 비명 없는 죽음. 산은 비명조차 앗아갔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그들은 낙화하는 벚꽃처럼 점점이 떨어져간다. 
 

가족을 잃은 천애고아, 산 이외에는 자신을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는 천재 등반가.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자신을 존경하는 어린 후배. 선배와 후배는 설산을 오르고, 후배는 등산 도중 추락하여 몸이 상한다. 줄 하나로 연결된 둘. 한 명이 죽어야 한 명이 살고, 둘이 함께 살 길은 없다. 후배는 스스로 줄을 끊어 선배를 살리고, 선배는 모든 이들로부터 '자신이 살기 위해 줄을 끊은' 비정한 산악인으로 몰리게 된다. 실력은 충분하나 세상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스폰서조차 구하지 못해 세계의 험산들에 다가갈 수도 없는 비운의 천재. 어두움의 천재. 어느샌가 나타난 '빛의 천재'는 그의 전부였던 산을 하나씩 정복하여, 오히려 그보다 빠른 걸음으로 세계 등산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나간다.  

그녀를 잃은 사진기자 그와, 후배와 세상을 잃은 천재 등반가. 둘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음에도 산을 좇고, 산에서 해답을 구한다. 그들은 과연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끝내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인생이란, 결국 산에 오르는 것이다. 저 유명한 엄홍길이 열여덟 번쯤을 도전하여 스무 번을 성공하였다던가. 아니, 스무 번을 도전하여 열여덟 번쯤을 성공하였다던가. 내로라 하는 산사람인 그도 절반 가까이는 '실패'를 간직하고 있다. 하물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은 절반 이상, 아니 거의 대부분의 도전이 실패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은 내게서 이미 멀어져 있으나, 절벽에 줄 하나로 매달린 듯, 인연의 끈을 끊기는 너무 고통스럽다. 줄을 끊어야 한 명이라도 살 수 있지만, 한 명은 상할 수밖에 없다. 둘 다 사는 길은 없다. 산은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개입하거나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내가,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정상, 어쩌면 꿈이라는 목표도, 대부분의 도전에 실패라는 답을 줄지도 모른다. 인생은 보고 있으나 결코 친절한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내가 살기 위해선 또 어떤 줄을 끊어야 하는가. 그 줄을 끊은 후 내게 돌아올 세상의 시선은 무엇일까. 

하지만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겠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이게 내 인생이니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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