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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한국동시 100년 애송동시 50편 ㅣ 문학동네 동시집 9
강소천 외 지음, 양혜원 외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시간을 견디는 것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지라도, 그 아름다움은 길어야 5년, 후로는 늘씬한 몸이나 탄력있는 피부가 아닌 그 사람 자체의 매력으로 친구처럼 동지처럼 함께하는 시간이 흘러간다. 아니, 외모로만 견디라면 도무지 못 견딜 것이다. 흰 쌀밥도 먹다보면 물리는 법, 눈이 부셔 아름다운 외모라 할지라도 아름다움이 눈에 익으면 어둠이 눈에 익어 눈이 퇴화된 두더지마냥, 아름다움도 식상해지고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은 아름다움 그 너머의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 퇴화되는 아름다움 말고, 영원히 변치 않을 그 무엇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 부르는 작품들, 고전 명작들은, 시간을 견디고 심지어 이겨내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널리 읽히고 권할 만하다. 독자의 입맛은 세대마다 바뀌며 문학을 비롯한 책의 세상에도 지는 해와 뜨는 달이 있는 법. 독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구하기에 '노장'으로, '거장'으로 살아남기가 쉽지가 않다. 그 와중에 100년을 견뎌왔다면, 정말 클래식이라는 칭호를 선사할 만하다.
새로 나온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제목을 들으면, 아마 열이면 열 동요 <고향의 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동요 '고향의 봄'은 알아도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이원수 님의 동시 '고향의 봄'을 떠올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온 국민이 즐겨 부른 그 노래, 원전인 그 동시 '고향의 봄'이, 소년 이원수가 열여섯에 발표한 작품이란 걸 떠올리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작년 2008년은 현대시 출범 100주년이 되던 해였다. 시인 최남선의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소년>에 발표된지 햇수로 100년을 채운 것이다. 100년, 강산이 열 번 이상 탈바꿈할 세월이다. 한국시, 동시는 100년의 세월동안 계속 허물을 벗어왔고, 허물을 벗는 만큼 자라고 성장해왔다. 그리고 100년을 견디고 자라온 경사스러운 해를 기념하여 어느 일간지에서 특별한 지면을 마련했다. 한국동시문학회 회장 이상교 선생님(동시작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동시인, 시인, 아동문학평론가 들이 선정위원으로 모여 100년을 빛낸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시들을 추려 뽑은 것이다. 새로 나온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는 선정위원의 다수 추천을 받은 동시만을 가리고 추려 50편을 꼽은 후 한 권의 동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한 편, 인용해본다.
반달
윤극영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 것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우리가 알고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찾아 보니 여기에 다 모여 있다. 그러므로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는 '읽는 동시집'이 아니라 '부르는 동시집'이라 말하는 게 어울리겠다. 동시 '반달'은 어릴 적 하던 '쎄쎄쎄' 류의 놀이로 수많은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작품이다. '국민학교' 시절, 저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손등을 부딪히며 양 손을 교차하는 여자애들의 손동작과 그 빠름을, 그저 입을 헤벌리고 바라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동시집을 읽으면, 아니 부르면, 언어의 아름다움과 동시의 순수함과 함께 추억을 건져올릴 수 있다. 옆에서 지켜보다 결국 나도 쎄쎄쎄를 배웠고,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부르며 손놀이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여자애들의 빠름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아, 이 책을 읽으니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을 지나쳐 늙수그레한 어른처럼 시들해져 버린,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한 동심에게 미안해진다. 고작 삼십여 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해 내 푸른 마음은 색이 바래 버렸는데, 우리가 부르던 노래, 우리가 부르던 동시는 100년을 견디고도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근 것처럼' 푸르고 푸르다.
우리 아이들은 멤버가 다섯 명, 아홉 명 씩이나 되는 가수들의 이름,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다 외우고 말하는데, 부모들은 도무지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거리에서 쇼윈도를 비집고 흘러 나오는 노래들이 다 그게 그거 같다. 아이들은 촌스럽고 뒤떨어진다며, 냄새나는 똥을 피하듯 부모와 어른을 멀리한다. 가수 이름 하나 못 외우는 게 왜 창피한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알까? 엄마 아빠들이 부르던 보석 같이 아름다운 노랫말들, 동요들, 동시들을. 하나같이 어리고, 잘생기고, 늘씬한 요즘 가수들은 줄줄이 꿰고 있지 못하지만, 엄마 아빠들은 부르면 따뜻해지는 동시 중의 동시, 클래식을 알고 있노라고 자신있게 말해주자. 아이들은 그저 이 동시집을 '읽고 있을' 때, 아이들에게 이 동시집으로 '노래를 불러줄 수 있다'는 것. 한국의 시와 100년을 함께 살아온 어른 세대로서 받은 축복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아이보다 책갈피에 단풍잎을 끼워넣던 까만 교복의 할머니들, 호출기에 '8282'를 입력하던 젊은 엄마아빠들이 가슴에 꼭 품고 간직할 클래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을 견딘 클래식, 감히 '한국인의 애송 동시'라 말할 수 있는 동시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힘주어,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