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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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이다. 1Q84 라는 것은, 9와 Q의 일본어 발음이 유사하기에 1984년을 희롱하듯 갖고 논 것이다. 제목을 가지고 놀기로는, <아키라>의 오토모 가즈히로 이후로 가장 천재적인 일본 만화가로 꼽히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 <철 크리트>도 빠지지 않는다.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라 철콘 근크리트다. 유치원 아이들 옹알거리는 말투와 말장난을 흉내내어 철근 콘크리트가 아니라 철콘 근크리트로 제목을 지었다는데, 어눌한 제목과 달리 본문 들춰보면 피칠갑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들이 다 큰 형님들 머리를 배트로 휘갈겨 피를 봐 주신다. 철콘 근크리트의 세계에서 머리에 피가 안 마른 건 애들이 아니라 어른이다.



<철콘 근크리트> 본문 중 

말장난이라 하나 글과 그림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 가장 중요한 제목 짓기에 한량처럼 그저 희롱만 던져두었겠나. 말장난 같은 제목 뒤로는 분열된 세계, 갈라진 세계, 오해와 다툼이 도사리고 있다. 제목만 보자면 술 취한 한량의 꼬부라진 혀로 내뱉은 발음 같으나, 속을 들춰보니 수풀에 숨어 갈라진 혓바닥 날름거리며 틈만 노리고 있는 살모사 대가리 같다. 놀고 희롱하듯 제목을 굴려댄 것은, 결국 강하고 단단한 세계에 제대로 한방을 지르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것이다. 몸을 많이 숙일수록, 더 많이 뛰어오를 수 있는 법이니까.

<1Q84>는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대한 하루키식 재생산이라 할 수 있겠다. 전함 포텐킨의 오데사 계단신이 민중에 대한 권력의 학살이었다면, 오데사 계단신에 대한 오마주인 언터쳐블의 계단신은 민중의 지팡이가 갱단을 상대로 내지르는 통쾌한 액션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오데사 계단에 임한 빅브라더의 군림이었다면, 하루키의 <1Q84>는 '법의 이름으로' 갱단을 학살하는 언터쳐블의 통쾌함처럼 힘을 가진 자, 주로 남성 권력에 대한 스타일리시 여성 킬러의 아이스픽(얼음송곳) 법집행이 번뜩인다. 물론 여성 킬러에게 법집행의 권위를 부여한 자는 없다. 그 권위를 부여한 것은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어디에서부터 뒤틀린 지 알 수 없는 세계, 사랑하는 그가 없는 세계, 두 개의 달이 뜨는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바로 1Q84년의 세계.  

그녀가 보통 이들처럼 1984년에 살았다면, 그녀는 아이스픽 대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철콘 근크리트>로 돌아와 보자. 1984년을 살지 못하고 1Q84년에서 살아가는 여성 킬러는 어느 순간 자신의 세계가 왜곡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철근 콘크리트가 아닌 철콘 근크리트의 세계에 사는 두 주인공 꼬마 역시 세상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있다 생각하지만, 안정되고 단단하다 생각했던 그 세계 역시 빅브라더의 손길 아래 서서히 무너져간다. 두 꼬마 주인공은 원치 않아도 철콘의 세계에서 서로 멀어지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위험의 세계로 내던져진다. 1Q84의 여성 킬러 아오마메가 사랑하는 덴고와 멀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력과 살인의 세계로 떨어지듯, 사랑하는 사람의 진폭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폭력은 가까워진다. 아니, 멀쩡한 듯 보였으나 사실은 진작에 왜곡되어 있던 현실에 눈뜬다고나 할까? 1984년과 철근 콘크리트의 세계에서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이 일상을 살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왜곡되고 뒤틀려 버린 세계를, 1Q84년과 철콘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비로소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진짜 세상'이 그들 앞에 열린 것이다. 오호, 영화 매트릭스런가. 모두와 함께 걸으면 '현실이라고 믿는 현실'을 살 수 있으나, 각성하여 눈을 뜨면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현실'이 눈 앞에 도래하는 것처럼, 1984년과 철근 콘크리트에서 살짝만 희롱하고 말장난 하듯 벗어나면 미쳐버린 세상, 폭력과 권력의 세상이 도래한다. 진작부터 있었던,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현실이 말이다.

 

<잘자 뿡뿡> 본문 중

 
1Q84의 여성 킬러 아오마메도, 날 때부터 킬러였던 것은 아니다. 아오마메에겐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데, '증인회' 신자인 부모의 손에 이끌려 원치 않는 포교활동을 다니며, 학교에서는 식사 전 이상한 기도문을 외워야만 했던 기억이다. 점심시간, 모두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또박또박 이상한 기도문을 외운 후 홀로 식사하는 아오마메.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던 아오마메에게 처음으로 '인간적인 시선'을 보낸 어린 덴고. 사고가 나도 수혈을 거부하고 과다출혈로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독실한 믿음의 표현이었던 증인회 신자인 아오마메는, 덴고의 시선에서 피보다 뜨거운 사랑을 느낀다. 

이쯤 되니 만화 한편이 또 생각난다. <소라닌>으로 유명한 아사노 이니오의 <잘자 뿡뿡>이다. 두 꼬마가 느와르를 펼치는 철콘 근크리트나, 노르웨이의 숲을 거니는 하루키처럼, <잘자 뿡뿡> 역시 뭔가 15도 쯤 일상에서 뒤틀려있다. 주인공 뿡뿡은, '철근 콘크리트'를 '철콘 근크리트'로 발음하는 유치원생이 그린 것마냥 선 몇가닥으로 그려진 '사람도 아니고 새도 아닌 이상한 생명체'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대가리 뿡뿡이 좋아하는 소녀는, 엄마를 따라 원치않는 포교활동을 다니는 소녀 아이코다. 엄마 손에 이끌려 포교활동이라니, 아이코나 아오마메나 매한가지, 따돌림 당하는 포교 소녀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 이성에게 꽂히는 것도 <잘자 뿡뿡>이나 <1Q84>나 매한가지. 아이코는 뿡뿡에게 자신을 이 세계에서 구원해달라 말한다. 점심 때마다 주술 비슷한 기도문을 외우던 <1Q84>의 아오마메에게 덴고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것처럼, 아이코 역시 인간이 아닌 새대가리 뿡뿡에게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자신의 믿음 속 신이 아닌 새대가리 뿡뿡에게 요청한다. 

 

<잘자 뿡뿡> 본문 중

세상이 '비정상'이라 일컫는 이들에게는 '진짜 현실'과 함께 희망과 동경의 낙원이 펼쳐져 있다. 중학생이 되어도 어떤 친구는 여전히 UFO 또는 정체불명의 신과 교신하며, 어른들 포교활동의 희생양인 소녀는 인간이 아닌 새대가리 뿡뿡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하지만 살펴보노라면, 새대가리 뿡뿡과 외계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 이상한 친구들 빼곤 모두가 비정상이다. 우리가 '정상'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자위하며 만족해하는 삶이, 사실은 지독히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삶인 셈이다. 오히려 1Q84와 철콘의 세계, 새대가리 뿡뿡이 말을 하고 걷는 세계가, 우리가 믿는 '현실'보다 더 인간적이고 사랑을 품은 삶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여지껏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방대한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하루키가 내놓은 5년 만의 장편소설이며, 그의 문학을 집대성한 작품이라 칭송받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가 여느 무협지처럼 외딴 동굴에 떨어져 무공비급을 얻는 바람에 갑자기 내공이 증가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갑자기 <1Q84>에서 신묘막측한 문장을 선보였다거나, 세상이 놀랄만한 엄청난 소재를 등장시켰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 킬러라는 것만 해도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소재 아니던가. 하지만 <1Q84>를 일컬어 하루키 문학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평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하루키의 시선이나 응대가 달라져서가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저 시대를 상실했거나, 양을 찾아 모험을 떠나거나, 달리기가 좋다고 내처 달리는 할아버지 작가가 아니라, 낯선 1Q84의 세계에 던져졌으나 현실에 눈뜨고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적극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하루키가 <1Q84> 전과 후로 나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기에서 애액이 나오지 않아 느끼기가 불편한 여성처럼 상실의 시대, 불감의 시대에서 외롭고, 떠돌고, 꿈을 꾸는 청년들, 쿨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독히 외로운 청년들이 거리를 누비는 세계가 아니라, 비록 남과 다른 1Q84의 시대를 살아도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덤벼들기에 충분히 그들은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하루키가 느끼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일본인들, 정신 없이 살아오면서, 때론 누군가를 짓밟고 때론 누군가에게 짓밟히면서, 가열찬 투쟁과 그보다 더 뜨거운 경제성장 속에서 1984년의 수면 아래 진짜 세계, 1Q84년의 세계는 잉태되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 어린 아이를 거리로 내모는 이들, 수혈을 거부하여 수술대 위에서 죽어가더라도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믿음을 부여잡는 이들, 말도 안 되는 믿음에 투신할 만큼 붙잡아야할 확실한 자아가 없는 이들, 쿨해 보이고 멋져 보이며 프리섹스를 즐기는 듯하지만 그만큼 껍데기뿐인 청년들. 느끼지 못하는, 상실한 사람들, 불감의 사람들. 새대가리가 더 인간적이고, 꼬마의 주먹에 희롱당하는 어른들, 권력들. 하루키가 써온 쿨해 보이지만 공허한 이야기들. 
 

하지만 하루키는 1Q84년의 밤하늘에 두 개의 달을 띄워놓고, 1984년을 사는 이들은 그저 한 개의 달을 볼 뿐이지만, 어딘가 당신의 진짜 사랑은 당신처럼 두 개의 달을 바라보고 있다 말한다. 아이코와 뿡뿡이 되었든, 철콘 근크리트의 두 소년이 되었든, 당신과 똑같은 두 개의 달을 보는 이가 세상에 있다 말한다. 왜곡된 이 세계, 반듯하고 질서 정연해 보이고 경적 한번 제대로 울릴 줄 모를 정도로 신사적이고 배려하는 일본인들이 가득한 듯하지만 혼네와 다테마에가 공존하는 세계. 겉으로는 평화로운 일본의 세계이지만 그 아래에는 공허함을 쿨함으로 포장한 프리섹스와 번성하는 섹스산업, 야쿠자와 폭력, 신흥종교와 독가스 테러, 초등학생이 더 어린 '어린이'의 목을 잘라 담장 위에 올려놓는 지독히 비현실적인 현실이 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러한 공허함과 1984년으로 멀쩡하게 포장된 삶 아래 1Q84년의 진짜 세계에서 '진짜 사랑'을 찾는 '진짜배기' 아오마메와 덴고가 인간으로서 살고 있음을 얘기한다. 

1Q84 이전의 하루키가 공허와 부적응의 표피를 핥으며 초현실과 신화를 감싼 당의정 같은 얘기를 선보여왔다면, 신작 <1Q84>는 쓴 게 몸에 좋은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 난 약을 삼킨다, 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 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신뢰하지 않지만, <1Q84>이후로, 예순이 넘은 하루키에게 비로소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지오웰이 <1984>를 세상에 선보인 해에 태어난 무라카미 하루키, 예순이 넘은 노작가를, 나는 비로소 신뢰하게 되었다. <1Q84> 2권이, 몹시 기다려진다.  

아직 <1Q84>의 2권을 맛보지 못했다. 아직 합쳐져 하나를 이루지 못한 두 개의 달 아래 사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은 더욱 부각될 것이며, 하루키의 초현실적인 세계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하루키를 통해,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 뭔가 답을 찾을 것 같다. 문학에 꼭 답이 필요한 게 아니며 문학이 세상을 바꿀 필요도 없겠지만, 공허함을 노래하는 <1Q84> 이전의 하루키가 <1Q84>이후로 어떤 결말을 선보일지, 벌써부터 잠이 아까워진다. 
아, 잠을 아껴가며 볼만한 책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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