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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사무라이 1
마츠모토 타이요 글.그림, 에이후쿠 잇세이 원작,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사내들이 손과 발을 맞부딪혀 승부를 겨루는 격투기를 좋아한다. 이 녀석 마초인가, 라고 섣불리 넘겨짚지 마시고 얘길 들어주시라. 링 위에 오르면 목표는 오직 하나 뿐. 승리. 승리를 위해 평소 흘린 땀과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고, 토악질이 나올 때까지, 물 밖으로 내쳐진 금붕어처럼 숨이 깔딱깔딱 차오를 때까지 치고, 차고, 두들겼던 노력은, 링 위에서 진실되게 돌아온다. 내가 나의 훈련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설사 패자의 위치에 서도 부끄러울 게 없다. 방금 전까지 죽기 살기로 치고받던 사내들은 경기가 끝나고 친구가 된다. 솔직담백하고 얼마나 깨끗한가.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한 무도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가장 빠른 길, 가장 강한 길을 찾아 손을 내지르고 발을 뻗는다.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주먹,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꽂히는 발. 손발이 그리는 선과 곡선은 간결하고 빠르기에 단단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선의 아름다움으로는 검의 길을 빼놓을 수 없다. 무협영화 등을 보면 폴짝, 하고 집도 뛰어넘고, 허공에서 칼을 주고받고, 칼질하다 말고 몇바퀴씩 돌고 그런다지만, 그건 영화일 뿐이고. 실제 검을 뽑아든 상태라면, 진검을 든 상태라면, 눈짓 하나 손짓 하나 차이로 내 팔이 잘려나가고, 내 목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칼을 마주했을 때는 글러브나 헤드 기어를 쓴 게 아니고, 호구를 착용하고 죽도를 든 게 아니므로, 오직 살고 죽는 길, 간결하고 간결하여 베거나 베이거나, 찌르거나 찔리거나, 두 길밖엔 없다. 멋이 깃들 틈이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에, 검이 그리는 선과 길은 탄복이 나올만큼 강하고, 아름답다. '발도'만 해도 어떤가. 쉽게 말해 그저 허리춤에 찬 칼집에서 칼을 꺼내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상대의 발도를 내 눈으로 보았다면, 아마 바닥에 뒹구는 머리에서 쳐다본 것일 터다.
여기,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려낸 작품이 하나 있다. <죽도 사무라이>.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이 작품은 극강의 발도술과 같다 하겠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펜을 뽑았고, 펜을 뽑은 것을 본 순간 나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숨이 제대로 끊어졌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자신의 실력과 작품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확신에 찬 인물이니까. 베인 자리는 깨끗하고, 내 몸은 베였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여 잘린 혈관은 두리번 두리번,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였다가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고 곧 피분수를 뿜는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혈진(피털기)를 하고 있다고나 할까.
현대물, 그중에서도 <핑퐁> <제로> <하나오> 등을 통해 탁구, 복싱, 야구 등의 스포츠와 그 중심의 천재들을 다뤘던 마츠모토 타이요가 시대극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적잖이 우려를 했던 게 사실이다. 검을? 검 이야기를? 마츠모토 타이요가 에도시대 사무라이를 그린다고? 그가 나르시시즘의 극한에 선 듯한 천재 만화가라는 것은 인정하겠다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국어판으로 소개된 <죽도 사무라이>를 접하고 나서, 이 작품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검류, 예컨대 '마츠모토 타이요류'라고나 할까, 하나의 검류를 완성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의 선맛과는 완전히 다른 붓과 먹을 활용한 흐르는 듯한 그림은 농익을 데로 농익었고, 화면 연출과 구성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효과음 등을 컴퓨터 서체가 아닌 손글씨로 새로 써 넣은 출판사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죽도 사무라이>, 이런 책은, 받아드는 입장에서는 행복에 겨웁지만, 어떤 말과 어떤 찬사를 갖다붙여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칼을 뽑지 않아도 이미 칼에 베였다는 느낌이랄까. 마츠모토 타이요가 개척한 또 하나의 신천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분께 권한다. 후회는,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