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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최고다. 텍스트와 일러스트의 조화가 완벽하다. 근래에 이토록 완성도가 높은 책을 만난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없지 싶다. 먼저 이 말을 해야겠다. 이 책, 어린이 책이다. 동화다. "뭐? 애들 책이라고?"라고 한 수 접고 들어가지 마시라. 동화가 소설보다 쓰기 어렵다. 정확히 20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어린이 책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든, 접해보면 좋겠다. 특히 책을 좋아하는 이, 쌓이고 꽂힌 책만 보면 배가 불러오는 이, 서점이 고향같은 이, 밥 먹고 똥 눌 때 책이 없으면 안 되고 책을 읽다 밤을 지새우고 불빛 밝힌 채 펼쳐진 책을 동무 삼아 잠에 든 이, '활자 중독증'인 이들, 종이와 텍스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특별히 권하고 싶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말한다. 이 책, 성인 소설과 인문서들로 가득찬 책꽂이에 꽂아도 부끄러워할 일 없다. 책의 표지와 디자인 자체가 굉장히 세련되고 고풍스러워서 어른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절대 기 죽지 않을 아이다. 아니, 오히려 고서와 같은 고고함과 묵향마저 느껴져 은근 뿌듯할 것이다. 그래, 다 필요없다 치고, 도서관에서라도 빌려 읽어라. 책은 일만 원 내면 오백 원 거슬러주는 값인데, 어찌하다 출근길에 보니 지갑에 단돈 삼천 원 뿐이다. 당신이 나와 현금 사정이 같다면, 동네 도서관에 가서 빌려달라 말하자. "저 삼천 원 밖에 없는데요..."란 말은 굳이 안 해도 좋다.
동화는 일단 단문으로 씌여져야 한다. 수사, 은유의 넘침, 좋지 않다. 아이들이, 특히 염소 새끼 같이 뭐든 뜯고 헤치고 맘대로 싸돌아다니기 바쁜 '사내아이놈'들에게 긴긴 문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히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린이에게 읽히는 문장은 짧고, 간결하다. 한마디로 100m 경주라고나 할까. 휘릭 읽혀야 하고, 짧은 거리 안에서 모든 승부를 내야한다.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이라지만 많은 환호와 관심을 받는 것은 단거리, 그중에서도 100m 경주가 아니던가. 눈 깜짝할 새 모든 것을 폭발시키듯 터뜨리고, 산화하듯 몸을 태워야한다. 어린이책의 문장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다. 화려함이나 맵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짧은 기도가 하늘에 닿듯, 간결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지방은 다 태워버린 단단한 몸짱 몸매, 몸짱의 문장이기에, 짧은 글은 우리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다. 대상 독자가 더 어려질수록 문장의 간결함과 완벽함은 더욱더 필요하다. 아가들이 읽는 그림책이 시를 읽는 듯한 맛이 나는 것이 그 때문이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을 쓰는 것은 대상 연령이 낮아질수록 힘들고 어려워진다.
<책과 노니는 집>은 쓰기 어려운 동화인데다가, 화자가 어린 아이이다. 배경은 조선조 말이다.
실로 망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아이가 관찰자가 되든, 화자가 되든, 아이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사이에서 뚜쟁이 역할 비스무레하게 하는 여자아이처럼, 애초에 배경이 소설이라면 쉽겠으나, 동화에서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되 역사물의 성격을 보이며 어른들의 세계를 묘사하기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애초에 작가라는 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담아두고 사는 이들이다. 일반인들에겐 그저 '꽃' 이나 '물안개'의 한 단어 사물이 그들에겐 '서사'가 되고 '기승전결'이 되는 식이랄까. 독자의 가슴에 쌓인 이야기보다 훨씬 고밀도의 이야기를 가슴에 뭉쳐놓은 이들이니, 작가들은 텍스트 안에서 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특히 어린이가 화자가 되어 어른들의 세계를 묘사하게 되면, 초반엔 그저 순진무구한 아이같던 녀석이 후반부엔 작가의 영이 빙의되어 입만 아이일 뿐 하는 말은 작가와 다름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라, 조금 이따 작두도 타겄네. 쪼만한 아이 녀석이 어찌 세계관, 우주관에 대해 논하고 인생의 철학에 대해 말한다더냐. 갈팡질팡하는 어른 출연자에게 이젠 아주 갈 길까지 알려주는데, 무슨 고승이 화두를 던지듯 툭, 평상에 엽전 꾸러미 던지듯 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아주 시에 철학에 '책의 메시지'이다. 아아, 이런 경우 많다.
<책과 노니는 집>의 완성도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일관성있는 화자와 캐릭터의 연출, 캐릭터의 구축이라 하겠다.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이고, 어른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이다. '천주교 박해'라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야기의 전반에 드리워지지만, 결코 천주교가 한국사에 어땠네, 탄압의 정치사는 이랬네, 저랬네, 사실은 꿍꿍이가 있었네 따위의 음모론, 양놈 코쟁이들이 종교를 앞세워 미개인들을 침략하네 뭐네. 그런 것 따위 전혀 없다. 작가로서 말하고 싶은 근질근질함, 꾹 참아 주시고, 그저 아이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고 해서 순진무구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이야기는 긴박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되며, 천주교 박해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후반부에는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거침이 없다. 평소에 얼마나 많은 습작을 했을지 짐작케 한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사건이 일단락된 마지막에는, 주인공 아이와 아버지 사이의 비밀이 드러난다. 전혀 생각 못한 반전인데, 신파조로 흘러갈 법한 반전을 아주 쿨하게, 깔끔하게 그려내며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깔끔한 한정식을 먹은 뒤 '국내산 잣알'을 동동 띄운 시원한 수정과를 마시듯 입안이 개운하고, 눈이 개운하다. 참으로 깔끔한 마무리이다. 작가 개입과 이야기의 완성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공연을 멋지게 해내고 이런 멋진 서사와 긴장감을 선물한 작가에게 박수를 쳐주자.
- 덧붙임 -
주인공 아이의 이름은 '문장'이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는 먹물을 먹은 선비들이 자주 오가는 해장국집 골목 옆 허름한 집을 사서 자신들만의 '책방'을 내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 주인공 '장'이는 필사쟁이로, 한문 책과 언문 책을 필사하는 일을 하는 '필사쟁이'이다. 지금의 인쇄업자, 출판업자 되시겠다. 한문으로 씌여진 책을 필사해야만 '프로 필사쟁이'로 여겨주는 풍토에서, 언문을 사용하여 모든 백성이 지식 앞에 평등해지고 능력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부분에선 날카로운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밤낮없이 공자 맹자를 파고 한자를 공부하면 뭐하느냐? 정작 청나라에 가면 입도 뻥긋 못하고 겨우 필담으로 더듬거리는 것을."
_<책과 노니는 집> 본문 155페이지 부분 인용
요 문장 고대로 옮겨서 영어 몰입교육 백날 떠드면 뭐 하냐? 정작 쌀나라에 가면 입도 뻥긋 못하고 바디 랭귀지에 메모판에 글 써서 더듬거리는 것을!이라고 바꿔 주셔도 되겠다.
또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자'로서의 기본 자세, 책을 대하는 자세, 독자에게 맞는 책을 권하는 마음가짐 등에 대한 묘사이다. 일일이 묘사할 수는 없으나 부분 부분 보이는 책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참으로 멋스럽고 세련된 맛이 느껴져 좋았다. 당시에는 천한 일이었겠으나 책을 대하는 자로서의 자부심, 고풍스러운 멋을 아낄 줄 아는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 등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러스트를 눈 여겨 보자. 그림책 <엄마 마중>으로 유명한 그림 작가 김동성 님이 먹빛 잔잔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주셨다. 참으로 빼어난 완성도이고, 텍스트의 무게를 받쳐주며 더욱 눈부시게 함에 부족함이 없다. 그림만 봐도 참으로 아름답다. 빼어난 그림과 탄탄한 글이 만나 참으로 즐겁고 기분 좋은 동화가 나왔으니, 그 이름은 바로 <책과 노니는 집>이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아이와 함께 책과 노닐어 보시길. 즐거운 산책이 될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