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그림책 4
다비드 칼리 지음, 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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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적>의 속표지에는 이름 없는 사병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하얗게 빛나는 무대, 붉은 커튼.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인 사병은,
무대 위에 올려진 꼭두각시처럼 전투를 수행한다.
그가 죽더라도 서부전선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이다.

고독하다. 아무도 병사를 기억하지 않는다. 식량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전선은 교착 상태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세수를 하듯 일과처럼, 총을 한 방 쏜다. 총을 쏘는 행위는 적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는 듯하다. 하지만 병사의 내면은 붕괴되어 가고 있다. 전장에서 드러나는 것은 나와 적 단 두 명 뿐이다. 허세를 부리며 버텨가는 하루이지만, 아군은 나를 잊은 듯하고 우물물조차 마음껏 마시지 못한다. 행여나 적이 독을 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적이 밥짓는 연기를 피워올리기만을 기다린다. 취사준비를 할 때 적이 기습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날카로운 신경전. 병사가 알고 있는 '적'은 동물은 물론 아이와 여자, 노인까지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악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투 지침서는 적이 사람이 아니라 악마라 묘사하며, 승리와 생존을 위해 적을 무찌를 것을 종용한다.

마침내 병사는 결심한다. 전투지침에 따라 주변의 지형지물로 위장한 병사는 야음을 틈타 적의 참호로 기습을 감행한다. 숨소리마저 얼어붙은 불안과 공포의 밤. 바닥에 끌리는 팔꿈치와 무릎의 고통을 참아내며 포복으로 다다른 적의 참호. 하지만 적은 없다. 그리고 발견한 적의 전투 지침서. 그 안에는 자신이 악마로 묘사되어 있다. 아이와 여자를 죽이고, 노인과 가축까지 살육하는 악마의 모습. 그게 바로 병사 자신이라고 적의 전투 지침서는 얘기한다.

 '나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적힌 것은 온통 거짓투성이입니다.
이 전쟁을 시작한 장본인은 내가 아니라고요!
나는 절대 동물을 죽이지 않습니다.
나무에 불을 지르거나 물에 독을 타지도 않는다고요.
그가 이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_<적> 본문 중에서

병사는 알아차린다. 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적군 역시 기습을 통해 자신을 죽이고 전쟁을 끝내려고 공포를 견디며 참호를 나가 자신의 참호에 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보고 있을 것이다. 거짓으로 가득한 전투 지침서와, 한 인간인 병사의 가족사진, 그가 살아서 귀환하기만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사진을 말이다.
병사는 손수건에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것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악마'가 아닌 '그'를 향해 힘껏 던진다. 그가 내 편지를 읽어주기만을 바라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밤하늘에, 두 개의 플라스틱 통이 뜬다. 편지가 상대를 찾아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양장의 책 표지를 넘기면 책이 시작하기 전에 독자를 반기는 책의 면지에, 몰개성의 병사들이 대오를 맞춰 빡빡하게 서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 수많은 병사 중 두 명의 자리가 비어있다. 전쟁은 개인성을 앗아가고 사람을 몰개성의 전투 소모품으로 전락시킨다. 웃음과 표정이 있는 남자들도 군복을 입으면 모두가 똑같아진다. 전투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개성이 아니라 명령에 충복하는 '병사'라는 소모품, 교체 가능한 소모품이다.
담백하고 수수한 그림 한장 한장을 넘기다 보면 전쟁이 앗아가는 것들, 비인간적인 전쟁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몇 가닥 안 되는 가냘픈 선으로 쓱쓱 그려진 그림은 비어 보이고 약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반전의 메시지는 그 무엇보다 강렬하다. 상자는 딱딱한 겉이 아닌 비어 있는 공간이 쓰임새가 있듯, 그림은 그림책 곳곳에 수많은 여백을 남기지만 빈 공간 모두에 깊은 사유와 평화의 메시지가 녹아있다. 아이가 읽어도 좋으나 철이 든 어른이 읽을 때 더 좋은 그림책.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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