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유리공예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신기하고도 신기하다. 투박하고 꺼끌꺼끌한 모래에서 어찌 이리 시릴 정도로 부시고 투명한 유리그릇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일까.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단편모음집 <영혼> 중, 모래여자 편. 사랑하는 타마코와 이토. 평범한 외모에, 삶은 윤택이 아닌 궁상에 가깝게 쪼들린다. 이토는 주점에서 깎아진 파인애플을 이쑤시개에 꽂아 들이밀듯, 취객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며 끊어질 듯한 삶을 이어간다. 굳이 인사동에 돗자리를 깔만한 실력이 아니더라도, 이토의 상을 보아하니 외모는 덥수룩, 그저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에 능력 제로, 은행 잔고 제로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관계없다. 사랑하는 타마코가 곁에 있으니. 둘은 오래되어 낡고 쓰러질 듯한 목조 건축물에서 저렴한 세를 내고 살아간다. 낡은 집이지만 둘의 보금자리엔 욕조까지 딸려있다. 욕조는, 타마코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다. 타마코는 혹 인어공주인건가?

아니다. 타마코는 모래여자다.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몸에서 모래가 배어나오는 특이체질. 욕조에 몸을 담그면 어느새 바닥에 얇은 모래층이 생긴다. 이부자리를 털면 풀풀 날리는 먼지와 모래들. 낡은 집은, 구석구석에 모래가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낡았기에 주변 누구도 타마코의 이상 체질을 눈치채지 못한다. 집과 욕조와 연인을 둘러싼 그 모든 것엔, 사랑에 빠진 남자의 배려가 바닷가의 모래사장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고, 해변을 거닌 발 틈에 묻어나온 모래처럼, 곳곳에 사랑이 스며들어 있다. 없는 것은 불편함이지 부끄러움이 아니다. 적어도 사랑하는 그 둘에겐.

바람이 불고, 이토의 그림이 거리에 휘날린다. 허둥지둥, 꼭 생긴대로 구부정하게 그림을 쫓아 달려나가는 이토. 그리고 그런 이토를 덮칠듯 달려오는 기세 등등한 트럭 한 대. 타마코는 살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려 이토를 향해 모래를 날린다. 그리고,

타마코는 몸 속의 모든 진액을 끌어올린 듯, 얇고 바스락한 몸뚱이를 남긴다.
......................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작품은 국내에 몇 권 소개되지 않았지만, 몇 권의 작품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천재가 분명하다. 작품에 음악처럼 흐르는 독특한 세계관, 한 발을 환상계에 걸친듯한 아련한 스토리 라인, 오컬트 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 등장하는 이들은 무언가 하나씩 매듭이 풀리거나 잃어버린 모습이지만, 또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 귀엽기까지 하다. 낯설고 어둑한 세계가 독자에게는 불친절해 보인다 말할 이 있겠으나, 천재더러 땅을 밟으라 하기보단 읽는 우리가 조금은 까치발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특히 모래여자가 쓰러진 저 장면을 펼쳐들었을 땐, 전율이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몇 글자 올려지지 않은 화면에 쓰러져 있는 타마코. 화면의 분할, 선의 운용, 대담하고도 쓸쓸하면서 뭉클함이 느껴지는 시선. 도로를 핥고 지나가는 사각사각 모래바람 소리가 들릴 듯, 멈춰버린 시간과 모래 한 톨의 흐름마저도 읽힐 듯한 혼이 담긴 그림.

까슬하고 불투명한 모래는, 불에 단련되어 투명하고 빛나는 유리그릇이 된다. 모래와 모래는 뭉칠 수 없고, 밀려오는 바닷물을 튕겨내거나 물에 쓸려가는 수밖에 없지만, 유리는 자신의 모든 속을 온전히 내어보이며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다. 수시로 모양을 바꾸는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물길 마저도, 유리그릇에 담기면 유리의 모양에 동화되어 유리의 품에 안긴다. 다만, 유리는 쉽게 깨진다.

사랑도 이와 같은 게 아닐런지. 까슬하고 생채기를 내는 짠 모래는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지만, 불과 같은 사랑을 통해 투명한 속내를 드러내며 모양을 바꾼다. 그이를 위해 나를 바꾸는 물길이 되어 그이 품에 안기기도 하고, 그이를 안았으나 나는 없고 사랑하는 사람만 비추는 투명함으로, 때론 개성을 잃을 정도로 상대에게 나를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되어 유리그릇에 분홍빛 물때가 끼고, 다른 그릇이 더 눈부셔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하자. 우리는 모두 까슬한 모래였고, 그이를 만나 비로소 투명한 유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식어버린 사랑이라면, 불길에 타올라 유리로 화하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보자. 아름다운 것은 약하기 마련, 유리는 쉽게 깨진다. 우리의 사랑 역시 불길에도 견딘 시절이 있으나 너무나 연약한 가슴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깨어지기 전에, 나를 바꾸던 그 불길을 떠올려 보자. 모래여자 타마코, 이토와 영원히 행복하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