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리뷰오브북스 8호
김만권 외 지음,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부 엮음 / 서울리뷰오브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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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서 읽지 말아야지 했던 전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온 세상 모든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은 변함이 없는데 속독은 엄두도 못 낼뿐더러 책 편식이 점점 심해지기만 하니 욕심을 조금이라도 충족시킬 희망의 동아줄 같은 책이랄까...?

 

처음 5호를 읽고는 어렵다’, ‘그들만의 리뷰라는 느낌을 남겼었는데, 이번에 읽은 8호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먼저 포커스 리뷰에서는 공산당 선언, 녹색 계급의 출현, 사물의 소멸을 다룬다. 제목만 보면 서로 그다지 관련이 없는 듯한데 책 세 권이 공산주의,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프롤레타이라라는 열쇳말로 얽히고설켜 있다. 이 분야에 무지한 사람도 이해하기 쉬울 만한 서평이었다. 사물의 소멸의 서평은 특히 감탄하며 읽었는데 도서를 논리정연하게 요약한 뒤 저자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하여 비판하였다.

리뷰에서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녹스, 판타 레이, 최재천의 공부를 다룬 서평이 흥미로웠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서평에서는 깊이 있는 사고란 무엇인가가 드러나는데, 실제 드라마가 방영될 때 일었던 논란과 자폐인을 위한 공적 제도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판타 레이는 유체역학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대학교 때 전공과목으로 유체역학 수업을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역사가 더욱 흥미로웠다.(대학 전공 수업은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서울리뷰오브북스 5호를 읽기 전 목차를 둘러보다가 흥미로운 제목을 발견하고 먼저 읽은 부분이 있다. 바로 여러분, 번역하지 마세요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제 갓 번역에 발을 들였는데 번역하지 말라니요! 하며 헐레벌떡 글을 읽었다. 20년 넘게 번역을 한 조영학 번역가는 번역 강의 첫날 여러분, 웬만하면 번역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20년간 몸소 보고 겪은 번역가의 삶이 얼마나 지난했는지 느껴지는 말이다. 안 그래도 그리 대우받지 못하는 직업인데 AI의 등장으로 곧 사라진다고까지 한다. 정말 번역가가 멸종해도 괜찮을까? 글쓴이는 은근히 심통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10년 후 번역가가 정말로 사라진 세상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세상, 궁금하기는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책에 손을 대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에는 몇 호를 찾아 읽어볼까나!

하나의 예측이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되면 거부할 수 없는 예언이 된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 P24

디지털 자본의 성장 속에서 보호망을 잃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면, 낮은 임금에 아무런 보호망도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19세기 노동자들과 닮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 P26

《공산당 선언》에서 21세기에도 변치 않는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우리 몫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 P29

오늘날의 사회는 ‘외부의 지배자’ 없이도 ‘지배의 완성’이 이룩된 체제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그것이 위력을 발휘하는 반경의 ‘크기’ 면에서 보나, 주체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깊이’의 측면에서 보나, 명실상부하게 지배력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심리정치》, 45쪽) - P52

우리는 끝없는 자기 착취와 무한한 성과 창출의 명령이 단지 나 자신이 자발적으로 긍정하여 수용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며, 우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지배 질서의 규율에 의해서 조형된 것이자 사회 권력의 통제하에서 학습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P58

우영우의 차이를 장애로 만들지 않는 ‘사회적’ 조건들이 주로 착한 개인들이 제공하는 사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직장이라는 공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자폐인이 적절히 노동할 수 있는 조건은 공적 제도가 아니라 좋은 상사나 친구, 연인과 같은 사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 P80

우리가 고유한 언어라면, 모든 타자는 외국어이며 우리는 오직 번역을 통해서만 타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 번역은 퍼즐을 맞춰 가는, 몸으로 하는 작업이며, 일치를 향해 가지만 불일치에 익숙해지는 연습이다. - P87

일선에서는 매일 땜질을 하고 있는데 이상향을 이야기하는 것이 개선이나 제언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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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통번역 노트 - 잘못된 일본어 표현을 바로잡아주는
후쓰카이치 소오 지음 / 시사일본어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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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NHK 기자가 알려 주는 고급 일본어 기술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구입한 책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어를 올바른 일본어로 번역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으며 뉴스나 신문 기사에 자주 나오는 표현을 위주로 이야기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번역 방법을 세 가지로 구분 지어 보았다.

같은 의미, 다른 표현

정확한 어휘

올바른 일본어 어미와 조사

 

첫 번째, ‘같은 의미 다른 표현’. 먼저, 같은 뜻이지만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24시간 운영運營이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24시간 운용運用이라고 하며 한국에서의 통합統合은 일본의 종합総合과 같은 의미이다. 또 일본에서는 협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교섭이라고 번역해 주어야 한다. 다음은, 표현이 다른 경우이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은 일본어로 전 대통령, 한국의 대통령 당선인은 일본어로 차기 대통령, 한국의 대변인은 일본어로 보도관으로 번역해야 한다.

 

두 번째, ‘정확한 어휘에서는 단어의 미묘한 차이를 다룬다. 장비와 설비, 중단과 중지, 실종과 행방불명, 사건과 사고의 차이 등을 설명하며 상황에 따른 올바른 어휘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중단이란 지금까지 지속했던 일을 어떠한 이유로 잠시 멈추고 상황을 봐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이며 중지란 말 그대로 행위를 멈추고 재개하지 않을 때 사용한다.

 

세 번째, ‘올바른 일본어 어미, 조사에서는 まで までに, ぶり 以来, ~ ~등 바꾸어 쓰기 쉬운 일본어 어미, 조사를 설명하며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지 짚어준다.

 

이렇듯 한국어와 일본어는 비슷한 듯 다르다. 요즘 친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친구가 종종 왜 일본에서는 이렇게 말해?”라고 질문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저 문화의 차이일 뿐 절대 이상한 표현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는 짚으면서도 그 차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특히, ‘기존의를 설명하며 한국에서는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기존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전의 것은 아주 존재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왜 기존의존재가치가 없다로 이어지는지 한국인도 이해할 수 없는 해석이었다.

 

이렇듯 간혹 불쾌한 해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일본어를 공부하기에도 한국어를 공부하기에도 유익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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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안녕하니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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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까지만 해도 나이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이 허풍에 가득 찬 말처럼 들렸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 자랑, 허세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른들이 하는 말이 참 재미있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지혜가 있다.(물론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어른들도 여전히 많은데 그들 역시 반면교사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어제 사회초년생인 친구가 고민 상담을 해왔다. 자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말했다. 그건 너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너를 돌보지 않으니 오히려 그곳에 속하지 못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겠냐고. 그러니 사람들에게 한발 먼저 다가가 보라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그 친구를 도와줄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도 적당한 답이 나오지 않아 직장 상사에게 이야기를 전하며 물어보았다. 상사가 말했다. 겉도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타당한지 아닌지는 그 친구가 결정할 일이라고. 그것이 정말 착각이었더라도 친구가 직접 경험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편을 들어주는 일뿐이라고 말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전화한 이유는 회사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어딘가에는 자기편이 있다는 믿음을 받고 싶어서였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도움을 주겠다고 내뱉은 말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말이었는지! 얼른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내 말이 틀렸다고 사과했다.

 

넌 안녕하니1931년생 저자가 2000년에 쓴 책이다. 자신이 인생을 살며 느낀 점들을 자랑이나 허세 없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강요 없이 다정하게 전한다. 그런 저자의 목소리 때문인지 문장 안에 담긴 지혜가 오히려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넌 안녕하니라는 제목에도 저자의 다정함이 묻어난다. 정말 하루하루 목숨을 지켜 내는 것만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요즘, ‘넌 안녕하니라는 저자의 안부 인사가 간신히 억누르고 눈물을 치솟게 만든다. 간혹 마음이 너무 힘들 때 밥은 먹었냐는 엄마의 질문에 눈물을 왈칵 쏟듯 말이다.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는 처음 읽어보았는데 왜 이 저자의 책이 끊임없이 나오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참 마음이 따스해지는 책이었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페이스와 목표를 잃지 않는 것이다. - P29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을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하면 그 일을 하는 내내 힘들기만 할 뿐이다. 그 일을 어떤 식으로 해야 편할지 즐거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아서 하는 사람만이 그 일에 안정되고, 뭐랄까, 그 일로 얻는 보수 등과는 상관없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 P35

이 시대의 경박함과 슬픔은 ‘자각이 없다’는 점에 있다. 인간다움이란 도덕적으로 자각함을 의미할 터인데…. - P41

속박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세상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내 책임의 범위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실패했을 때는 움츠리고 ‘사람이니까 이럴 수도 있지’하며 스스로를 타이른다.

결국 나는 세상과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인 것이다. - P43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정상이 있다. - P45

자연스레 되어가는 대로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열쇠다’ - P50

나는 늘 나의 장래를 어느 정도는 계획하고 다소 노력함으로써 방향을 결정지으려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어떤가. 그들은 나의 조급함이나 불안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코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열매 맺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기다렸다. 그것이 대자연의 순리일 것이다. - P53

자신의 불행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모두 몸 어딘가가 안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자신도 평소에는 그다지 신경질적이지 않지만 몸 상태가 조금 나빠지기라도 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화가 나고 ‘정말, 나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며 낙심하기도 한다. 바보 같은 얘기지만 재능이란 하루 아침에 없어지거나 생기는 것도 아닌데, - P57

외부적인 자극으로 하나하나 변한다고 주장한다면 나 자신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P61

타인은 얼마나 나 자신을 키워주는 존재인가,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조금도 완성할 수 없다. - P66

상대에게 용서를 빌게 할 정도라면 그냥 뒤에서 몰래 모멸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 P69

다른 사람의 영역에 들어가면 자기 주장을 하지 말고 그 사람의 방식에 따르라는 말이다. - P85

가끔은 대충 넘겨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 P90

인간 사회란 오묘하여 옛날에 몹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 존재를 원망했던 사람이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나를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었음을 알게 될 때도 있다. - P91

상대가 일을 그르치게 하려거든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모든 싸움이나 투쟁이 다 그렇다. 화가 나면 인간은 영락없이 허점을 보인다. - P92

실은 처음엔 실패가 두려웠지만 여러 번 실패하다보니 사방팔방에 틈이 생겨 의외로 통풍도 잘 되고 쾌적하다! - P112

사람이란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사람의 수만큼 현명해진다. - P130

고난과 안일이 번갈아 나타나고 그 변화를 즐기면서 지치면 쉬고, 쉬고 나서는 다시 싸워보는, 그러한 기복을 맛보는 심경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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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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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책을 읽고 싶어서 무슨 소설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등산에 끌렸던 걸까, ‘여자에 끌렸던 걸까. 미스터리 소설 작가가 쓴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어떨지 궁금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제목 그대로 여자들이 등산을 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단편 소설이다.

기분 나쁜 미스터리, 이야미스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나토 가나에의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이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탐탁지 않은 직장 동료와 단둘이 산을 오르게 된 여자, 맞선 파티에서 만난 남자와 등산 데이트를 하게 된 명품 차림의 여자, 나 홀로 등산을 좋아하는 여자, 의사와 결혼한 언니와 아빠 밑에 얹혀살며 번역가로 근근이 먹고사는 동생, 배우를 꿈꾸는 남자와 다리를 다치고 배구 선수의 꿈을 포기한 여자, 사랑했던 사람과 올랐던 산을 혼자가 되어 다시 오르는 여자, 등산 친구를 찾으려 산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여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딘가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단편적으로만 보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행세한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가벼울까 불쾌할 정도이다. 그런 주인공들이 산을 오르며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하면서 자기 생각이 꼭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등산은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와 함께 등산하다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밀어주고 당겨주며 힘을 보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짜증을 부리며 손을 내팽개치는 사람도 있다. 혼자 등산을 하다 보면 도심 속에서는 그냥 지나쳤던 새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그리고 새 소리가 참 예쁘구나, 내가 이렇게 예쁜 것을 놓치고 지냈구나 하고 깨닫는다. 미나토 가나에는 이렇게 평범하지만 쉽게 놓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고백백설공주 살인사건을 생각하고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아마 조금 실망스러울 이야기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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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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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내 곁엔 아무도 없을까, 다른 사람들은 아름다운 시절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데 왜 내 인생은 이리 외롭고 힘들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시기를 지나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한아름씩 고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생이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제목만으로도 눈을 사로잡는 이 책은 그러한 우리네 삶을 이야기한다. 다리를 잃고 고무다리를 찬 김 씨가 바다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을 파출소 직원이 발견하고 김 씨를 등에 업어 파출소로 데려온다. 김 씨는 아내 등에 업혀 생활을 하다가 아내가 집을 나가자 바다로 들어가려 했다고 이야기한다. 파출소 직원은 옛날에 어린 아들을 잃었는데 종종 무덤가에서 한 소년을 본다고 말한다.

 

저자 김경주는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저자의 타이틀답게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역시 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시극이다. 시극이라는 분야를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일반 희극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하지만 대사 안에 내포된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으며 그 의미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김 씨가 내뱉는 한탄도, 파출소 직원이 따끔하게 가하는 일침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 씨는 다리 대신 고무를 동여매고 다닌다. 비어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짐을 진 셈이다. 그 고무다리는 너무도 무겁다. 고무다리를 벗어던지면 나비처럼 가벼워진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 혹은 감추기 위해 짐을 진다. 그 짐은 너무도 무겁다. 구부정하게 짐을 지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나는 지금 아름다운데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는 내 모습도, 나를 위해 힘껏 짐을 진 내 모습도 모두 아름다워 보일 터. 그리고 그 곁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있었을 터이다. 나는 늘 아름다웠고 내 곁엔 누군가가 있었다.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이전의 나는 늘 아름다웠고 지금의 나도 참 아름다우며 미래의 나도 아름다울 것임을 일깨워 주는 책이었다. 인생은 쉽지 않다. 묵묵히 살아가는 자신을 사랑해 주자.

파출소 직원: 여자 등에 업혀 우는 기분은 어때?
김 씨: 다신 여자 등에 업혀 울 수 없는 기분보단 나아요. - P57

파출소 직원: 사랑하는 이가 떠나도 슬픔마저 함께 떠나진 않는 법이니까 살아야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김 씨: 전 거리를 떠나지 못해요. 제게 있는 조금 남은 다리론 멀리 못 가죠.
파출소 직원: 조금 남은 다리로도 충분해. 누구나 조금씩 남아 있는 부분으로 산다구. - P60

김 씨: 지금 제 곁엔 아무도 업고 전 몰라보게 야위고 있지만 세상은 저와는 상관없이 지나가죠. 전 제가 지나간 모든 거리를 증오해요.
파출소 직원: 세상이 자넬 불쾌하게 여긴다고만 생각하고 산다면 자넨 영영 사는 게 불편할 거야. - P63

파출소 직원: 자네 집에 있는 화장지, 촛불, 크레파스들에 대해 예의를 갖추라는 건 아냐. 다만… 증오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파괴하지는 말라는 거야. 자네에게 존재하는 삶의 능력 중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능력을 갖추고 싶다면 난 그만 말하겠네.
김 씨: 난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다리도, 아내도. 그리고 어쩌면 똑바로 생각하는 법도 잃어버렸는지 모르죠. - P65

김 씨: 그만해요, 그만. 그런 잔인한 말로 사람들을 감옥에 넣으셨군요. 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조금 남은 다리로 이미 충분히 외로웠고, 입속까지 넘어온 눈물을 삼키고 있고, 차가운 바닥을 헤매고 있어요. 몇 마디 말이나 생각으로 제 다리가 다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까. 난 이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아요. - P67

김 씨: 한 번이라도 저를 업은 사람은 절 내려놓고 모두 떠났어요.
파출소 직원: 다 큰 어른을 업어서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자넨 생각보다 무겁다구. 그리고 다들 갈 길이 있으니까. - P75

파출소 직원: 이봐, 보내기 힘들었지?
김 씨: …
파출소 직원: 그게 인생이야.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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