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 셰익스피어 & 컴퍼니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고혹적인 매력이 듬뿍 묻어나는 표지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었다.
저 자신만만하고 도도한 고양이의 뒷모습을 찍어놓은 센스가
독자로 하여금 한번 이 책을 집어들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 자신이 있다는 듯 보이지 않는가...
제목조차도 어찌나 멋지구리한지...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이라니... 입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는 이 순간에도 맘이 설렌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단순히 레포트를 쓰려고 자료를 찾으러 간다거나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를 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도서관에서 보낸 그 많은 시간들은
그저 책이 가득 꽂힌 서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데 보낸 것이었다.
우리 학교는 비교적 신간도 많이 가져다 놓았었고
새로 책을 신청하는 경우에도 2주 안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돈 안 들이고 새 책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무엇보다 나를 들뜨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서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생각지도 못 했던 책들을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다.
언젠가 봐야지 하고 잊고 있던 책들이나
보려고 하던 책이 꽂힌 서가에서 내 구미에 꼭 맞는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럴 때마다 카타르시스랄까... 그런 발견이 주는 재미와 오래된 책 묵은 냄새가 나를 꽤나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주로 수업을 듣던 건물과 도서관 건물이 꽤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강시간이 1시간만 생겨도 쪼르르 쫓아가곤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이 먹은 것도 취업을 해야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아쉽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 도서관에 출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책에 둘러싸여 행복했던 시절들 말이다.
어린 시절 집이 유난히 가난하던 때에
월세를 내지 못해 1년에 몇번씩 도망치듯 리어카에 짐 싣고 이사를 다니면서도
자식들 읽을 책을 꼭꼭 챙기셨던 분이 울엄마다.
창고같은 다락에 책을 올려 두시면 거기에 올라가 낮은 천장 탓에 허리도 제대로 못 피고
두다리 쭈욱 뻗어 거기에 책을 올리고 읽었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어두운 기억으로 갖지 않게 된 것은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 해 주신 울엄마 덕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방학 때는 학교 수업이 없는 때임에도 매일 학교에 갔었다.
학생들에게 개방되어 있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교무실 담임선생님 옆에서 책을 읽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엔 책이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었고
도서관에 앉을 만한 의자도 별로 없었다.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 같은 곳에 책들이 주섬주섬 담겨 있었고
나는 그곳을 휘저어 책을 고르고 교무실 선생님들 책상에서 그걸 읽었었다.
톰소여의 모험, 비밀의 화원,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었다.
이 책이 내게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었다.
셰익스피어&컴퍼니는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다.
방대한 양의 책들도 놀랍지만 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작가 지망생,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갔다.
서점주인인 조지는 가난한 글쟁이들을 서점에서 묵게 해 주고 글을 쓰게 했다.
이 책은 그곳에서 머물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문학을 사랑하고 예술을 아낄 줄 알며 사람의 선한 본성을 믿어주는 세상이 거기 있다.
파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도시이다.
패션, 음식, 거리, 미술... 어떤 것으로 설명해도 다들 최고라 꼽는 그런 도시에
어찌 이런 서점까지 자리하고 있는지...
마냥 부럽고 내가 있는 한국에 이런 곳이 없다는 게 한없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책은 내 책장에 오래오래 자리하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함께 할 것이며
어떤 비판을 하기 앞서 책과 이야기 그 자체를 사랑했던 내 순수했던 마음까지 함께 말이다.
이 책이 나와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 좋겠다.
내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책장 하나하나도 같이 빛이 바래가며 그렇게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알게 되고 읽을 수 있어서 난 지금 무척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