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미니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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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쇄 살인마는 자기만의 세상에서, 본인이 만들어낸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정신이 살짝 가출한 이들이지만, [이니미니]의 살인범은 그야말로 또라이 기질이 충만하다. 사랑하는 연인, 엄마와 딸, 직장동료 등 피해자들을 꼭 짝을 이루어 납치한 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곳에 가두고 물 한 방울 주지 않는다. 총알 한 개가 장전된 총만을 놔두고 살고 싶으면 상대방을 죽이라고 한다. 둘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나긴 고통 속에서 결국 상대방을 죽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결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오랜 감금 동안 피폐해진 몸과 마음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정신줄은 끊어지기 직전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인 이가 나와 가까운 사람일 경우라면 과연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살인범이 피해자들에게 던져준 게임(?)은 사실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를 죽이는 일이었다.


이 책에서 살인범은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진 않는다. 다만 방치한다. 심지어 한 명은 살려주겠다고까지 한다. 그런데 어째 역대 그 어떤 연쇄살인범들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느껴진다. 쏟아져 나오는 많은 장르소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잘 만든 설정이다. 다만 주인공 헬렌 그레이스의 행동이나 심리적 변화 등이 너무 급작스럽고 개연성이 없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도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어 잘 넘어가던 페이지를 멈추게 한다. 사적인 생활과 감정을 배제하고 일에만 몰두하던 헬렌이 오랜 시간 부하직원으로 데리고 있던 마크와 갑자기 깊은 관계를 맺는 것도 뜬금없고, 아무리 상황이 바뀌었다 해도 바로 그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녀가 비극적인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해 제이크와 그런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 역시 억지스럽다. 납치되어 감금된 인물들이 굶주림에 고통받다가 겨우(?) 이삼일 만에 개미와 바퀴벌레를 별 거부감 없이 씹어먹으며 바삭한 식감을 언급하는 것도 좀 걸린다. 찰리가 헬렌에 대해 원망과 미움을 품었다가 그녀를 다시 존경(?) 하고 인정하는 감정으로 휙 돌아서는 부분도 그렇다. 특정 사건이나 감정적 배경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물들이 심경 변화를 일으키며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친절이다. 상황을 미리 깔아준다면 독자들은 주인공이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유추할 수 있다. 작가는 독자를 좀 더 믿고 덜 친절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제본 상태가 왜 이따위지... 책 중후반 쪽에 제본이 잘못되어서 페이지 순서가 뒤바뀐 게 여러 장 있었다. 게다가 오타도 많고... 책 만드실 때 좀 더 신경 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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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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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레 노이하우스의 최신작이다. 좀 더 아껴두려 했었는데 몸이 안 좋아 집에서 뒹굴거리던 차에 읽었다. 들고 다니면서 보기에 이 책은 꽤나 무겁다. 왜 이리 무겁냐...


이번 소재는 장기기증이다. 장기기증의 문제점을 소설로 잘 풀어냈다. 분류를 추리/미스터리로 하기에는 너무 리얼해서 어딘가에 실제로 있었던 일 같다. 사실, 확인할 길이 없어서 그렇지 이런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


몇 년 전인가, 엄마랑 동생이 장기기증 신청을 했다. 어차피 죽게 될 몸, 여러 사람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동생의 경우 독신주의인지라 혼자 남게 될 경우 사후 처리까지 된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장기기증 자체에 거부감은 없다. 그러나 장기기증자의 신체에 피 묻은 붕대가 들어갔다던지 가위를 넣은 채로 봉합을 했다든지 하는 어이없는 뉴스를 듣게 될 때면 회의가 들었다. 고인에 대한 예의 문제나 의사로서의 윤리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런 행위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내 영혼이 육신을 떠났을지라도 그런 취급은 받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 아직까지 장기기증 신청을 망설이게 하고 있다.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큰 결심이 필요하지만, 받는 사람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책에도 나오듯이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기부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입장이 이렇듯 고통스러운데, 의술을 행하는 자들은 더욱 경건한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책에서 스나이퍼(살인자)의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아니다. 되려 관계자가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비뚤어진 욕망과 허황된 명예에 눈이 어두웠던 자들로 인해, 고통받는 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똑같은 고통의 무게를 그들에게 지워주려고 벌이는 일들이었다. 물론 살인이라는 방법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고통과 심정은 납득이 간다. 그 무게만큼이나 전달하는 메시지가 많은 책이다. 우리나라에는 과연 이런 일들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게 정녕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일까. 장기기증에 대해 여러모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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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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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원작이 있을 경우, 무조건 원작을 먼저 읽는다는 주의다. 책을 읽을 때는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반영되어 나 자신만의 비주얼과 이미지를 떠올리며 즐길 수가 있는데 영화를 먼저 보고 나면 그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원작은 그냥 텍스트의 나열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이라는 것을 스크린으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은 아니다. 시각화하는 과정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분량의 문제도 있고 제한된 상영시간 내에서 흐름을 잃지 않고 스토리를 무리 없이 풀어나가는 것도 문제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원작을 잘 살린 영화는 무척 드물었다.


오랜세월 고수해 온 내 원칙(?)에도 불구하고 [마션]의 경우 영화를 먼저 봤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그 자체로 최고였다(리들리 스콧 감독님,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이런 경우 원작은 스킵 하는 편이 나은데, 책도 괜찮다는 얘기를 들어서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책도 좋다. SF라는 장르 특성상, 모르는 용어와 장비, 설명들이 잔뜩 나오는데 영화에서 해당 부분들을 눈으로 확인한 후라 이해가 잘 되어 몰입이 더 쉬웠다. 친숙하지 않은 장르인 경우엔 잘 만든 영화가 원작의 이해도를 높여주나 보다. 물론 책을 읽고 이것저것 잔뜩 상상하고 궁금해하다가 영화를 보고, 그 후에 다시 한번 책을 들춰봐도 좋았을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도 그렇고, 마크 와트니도 그렇고 일단 살려고 하면 긍정적인 자세로 쉼 없이 움직여야 하나보다. 긍정적인 자세는 살아남기 위해 해야할 일들을 살필 수 있는 힘을 주고, 해야 할 일들을 하며 버티는 시간이 우울과 비탄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것을 막아준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낙천적이고 유쾌한 마크는 결국 살아돌아왔고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의 귀환이 기쁘더라. 책이 쓰인 방식이 마크 자신의 기록과 지구와의 통신 내용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읽고 있는 나를 상관없는 남이 아닌 관계자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유치하다 할지언정 전 세계가 각자의 잇속을 따지지 않고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낌없이 비용과 시간, 각종 노력을 쏟아붓는 과정이 기분 좋았다. 거기에 작가의 글발도 한몫했다. 텍스트로 쓰여진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신명 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감자를 키우던 때가 그립다. 감자밭이 사라진 후 막사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흙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굳이 다시 내다 놓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 흙을 갖고 몇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놀랍게도 박테리아 일부가 살아 있었다. 개체 수가 꽤 많은 데다 그 수가 점점 늘고 있다. 거의 진공에 가까운 대기와 극지방에 가까운 기온에 24시간 이상 노출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 감동적이다.

 짐작건대, 일부 박테리아의 주위에 얼음주머니가 형성되면서 그 안에 생존을 가능케 할 만큼 압력이 들어찼을 것이고 기온도 죽을 만큼 낮이 않았을 것이다. 수십만 마리의 박테리아들 가운데 한 마리만 살아남아도 멸종을 면할 수 있다.

 생(生)은 놀랍도록 끈질기다. 그들도 나만큼이나 죽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 p. 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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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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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 했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기준이나 잣대를 근거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건 정말 몹쓸 일이다. 나 역시 철없던 시절에 그런 짓거리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기억나는 일화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당한(?) 기억은 꽤 많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제법 큰일까지.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이 나중엔 나와 같은 행동을 하길래 너무 억울한 마음에 이유를 따져 물었더니, 그땐 몰랐지,라는 말로 간단히 넘어가더라.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더라.


 토니는 눈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너무 깊게 관여하려고도 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무리가 없는 선에서 대화를 이어가고 관계를 지속한다. 누구나 자신의 일은 크고 복잡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싼 타인들은 반대로 보이기 쉽겠지만, 토니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다. 이렇게 눈치도 줏대도 없는 남자라니...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본인의 기억과 타인의 그것이 다른 경우는 흔하다.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일 수도 있다. 당시에는 각자의 입장차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고 먼 훗날에는 시간이 흐른 만큼의 왜곡이 기억에 보태어질 테니까. 치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야 대부분 낯 뜨거울 정도의 일인 경우가 많겠지만 거기에 얽힌 타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긴다면 그냥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토니의 철없고 눈치 없음에 답답도 하다만, 조금 안타깝기도 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잘 쓴 작품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서툴고 철없던 어린 시절에 유독 마음 불편한 기억이 많은 나로서는 이런 작품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아직도 덜 컸다는 증거겠지만.


 변호사 과정을 밟았지만 환멸을 느낀 나머지 결코 일선에 뛰어들지 않은 친구가 하나 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길 변호사가 되겠다고 허비한 세월에서 하나 얻은 게 있다면, 더는 법도 변호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했었다. 이런 경우는 주위에서 꽤 흔한 편이잖은가.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 p. 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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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할런 코벤 지음, 이선혜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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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져있을 땐 연인과의 시간이 짧기만 하다. 영화를 보든, 놀이공원에 가든, 술을 마시든 늘 즐겁고 상대방이 나만큼 즐거운지 살피게 된다. 대화는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다.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게 마련이다. 그러다 연애 기간이 길어지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관계는 조금 달라진다. 상대방의 반응은 예측 가능하고, 더 이상 궁금한 거나 알고 싶은 것이 사라진다. 긴 시간 동안 보고 듣고 관찰하여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뒤라 그렇다. 현명한 커플들은 그 평온한 침묵을 공유하고 나누는 법을 깨닫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지만, 새로운 자극을 찾는 타입이라면 관계는 지속되지 못 할 것이다.


제이크와 나탈리가 함께 한 시간은 겨우 두어 달이다. 평생 함께 할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외부와 차단된 듯한 공간에서 보낸 짧은 시간 후 그녀는 떠났고, 제이크는 그녀에 대해 충분히 알기도 전에 그녀의 결혼을 지켜봐야 했다. 제이크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탈리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다고 한 것은 그래서이지 않을까. 게다가 제이크는 정치학 교수이다. 뭔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어 알아내고 납득할 만큼의 설명이 필요한 학자인 것이다. 나탈리와의 관계에서는 시작만 있었을 뿐, 진전이나 결론을 보지 못 했다. 풀지 못한 수학문제에 집착하는 과학자처럼, 제이크 역시 그렇게 나탈리에게 집착한 것은 아닐까. 심지어 그녀와 관련된 어떤 기록도 없다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제이크의 집착은 더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것은 사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다. 긴 역사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 댔지만, 사실 그 질문에 답하는 건 본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어야 한다. 사람은 주변인들과의 관계에 따라 변해가며 그 주어진 역할에 맞는 모습을 하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 모든 것을 끊어내야 한다면 어떨까. 지금껏 살아온 '나'를 버려야 삶을 지속할 수 있다면. 위험한 범죄자들의 마수에서, 세상이 바라보는 오해와 편견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법과 질서가 보호해 줄 수 없는 '나'를 지키기 위한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색다른 소재를 속도감 있고 재미나게 잘 풀어냈다. 한번 읽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더라. 영화도 있다던데 나왔는지 모르겠다. 한번 찾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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