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 루나파크 : 훌쩍 런던에서 살기
홍인혜 지음 / 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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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을 잘 쓴다는 개념은 참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많이 들어본 인용구나 시의 한구절, 소설의 한 문장처럼 누구나 인정하며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와 말투인데 침 잘 놓기로 유명한 한의원에서 아픈 곳을 찾아 한방에 침을 꽂아 넣는 한의사선생님의 손짓처럼 내 마음의 한곳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뭐라 표현하기에 애매했었던, 내가 늘 느끼던 감정인데 머리와 입 안에만 머물러 있던 것들을 적절한 옷을 입혀 밖으로 꺼내어 주는 그런 느낌.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부 현상처럼 아, 그래 내가 하고픈 말이 이거였어...하는 느낌... 홍인혜의 글을 내게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홈피 '루나파크'를 처음 방문한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어느날 발견한 그녀의 일기들을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개도 빼놓지 않고 읽었으며 가끔 업무가 지루해질 땐 장대한 복습을 여러번 하기도 했었더랬다. 그녀가 다른 곳에 연재하는 만화들이 업데이트 되는 날이면 꼭 들러 확인을 했었고 아직 올라오지 않았을 땐 괜시리 실망감과 아쉬움에 괜히 최근 일기들을 다시 뒤적여 보기도 했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 덕분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재능을 광고계에가서 살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선택하는 단어나 문구는 괜시리 웃음이 나고 흐뭇한 따뜻함이 있어 좋았다.

 

그녀가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국으로 떠난 이 이야기는 내게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은 경험이 있기에 남다르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적었던 일기들을 뒤적여봐도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에서도 여행정보나 관광지에 관한 글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건 아마 혼자 떠난 사람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홀로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타지로 떠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더이상 관광지를 도는 그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고 곱씹어보게 만들어주는 기회이자 경험이 된다. 굳이 앞날이니 꿈이니 하는 거창한 것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내가 어디쯤 있었는지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 정도만 다시 바라보게 되어도 내일을 향하는 내 마음은 조금 달라지게 마련이다. 타인에게 철저히 관심없는 '개인'에 오롯이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외국인들에 둘러싸여 있다보면 처음엔 그런 문화와 관습이 낯설게 느껴져 외롭게 다가오지만 곧 적응되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시간은 작가의 말처럼 슈크림 상태의 연약하고 소심한 내 마음과 정신에게 한겹의 파이껍질을 덧씌워 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고 조금은 단단해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떠나고 돌아온 후에 얻은 것도 달라진 것도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 역시 우울해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떠났다는 거,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새롭게 발견하고픈 무언가를 충분히 증명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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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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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줄거리-알라딘 책소개 중 발췌

세상은 마이클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부모의 사랑, 평범한 삶, 하나뿐인 남동생 줄리앙…. 어느 것 하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싸웠다. 싸워서 이겨 빼앗아야 했다. 거칠게, 누구보다 악착같이 거리의 킬러로 살아남은 마이클에게 세상은 언제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엘레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마이클에게 엘레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삶의 기회였다. 킬러로서의 삶을 끝내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길 원하는 마이클. 하지만 이번에도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사랑을 선택한 마이클을 배신자로 낙인찍은 조직은 온 힘을 다해 그를 제거하려 추적하고, 마이클의 정체를 알게 된 엘레나는 마이클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자신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마이클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운명에 정면으로 맞선다. ]

 

 

조직에서 발 빼려는 잘나가는 킬러 이야기다. 사랑하는 여자 만나서 새 사람으로 거듭 나서 잘 살아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 마이클이 조직의 손길로부터 도망다니다가 과거도 청산하고 피를 나눈 가족도 만나고 결국 여자친구랑 새 가정 꾸려 잘 산다는 이야기... 약간 뻔한 스토리이지만 책장은 휙휙 넘어가고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면 적당할 듯한 내용이다. 알고봤더니 가족이라는... 설정을 사용한 것을 보면 국내드라마로 만들어도 될 듯 싶기도 하고... 조폭이 흔히 주인공의 주변인물들을 못 살게 구는 것은 많은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정석임을 알 수 있듯이 여기서도 마이클의 동생을 노리겠다고 선전포고 한 순간 실질적으로 사건은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또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물론 당연한 수순으로 사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마이클의 고생은 왠지 엘레나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동생 때문인 듯 하다. 엘레나에게 굳이 뭔가 핑계를 만들어줘야 한다면 살아돌아가야 할 이유에 더 적합한 듯.

 

 

전에 다른 분 페이퍼에서 봤지만 뼈아픈 과거를 지녀 툭하면 악몽에 시달리며 조직 보스의 총애를 받고 언제나 냉철하고 침착하며 전설의 킬러이신 마이클이 '자기야~' 와 '사랑해~'를 쉽게 내 뱉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캐릭터 설정에 흠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단지 너무 외롭게 살아온 마이클이 사랑에 눈이 먼 탓인가... 냉정과 침착이라는 단어와는 사뭇 다르게 마이클은 여러 장면에서 감정에 쉽게 휩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폭력조직, 악덕고아원, 잊혀진 가족, 부패한 정치가, 정신분열증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긴 했으나 뭔가 적당히 뭉뚱그려 비벼넣은 듯한 모양새이다. 잘 만들어진 미스터리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각각의 단서들이 이리저리 정교하게 맞아들어가 큰그림을 완성하는 식이 아니라 이걸로 저걸로 퉁! 치는 뭐 그런 느낌?? 책 후반부에서 마이클이 아비게일 남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작가가 마감에 쫓겨 진득하게 사건을 풀어가지 못하고 서둘러 써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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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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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알라딘 책소개 중 발췌

교토대학 농학부 5학년이자 현재 휴학생인 '나'는 예전 애인 '미즈오 씨'를 연구하기 위해 관찰을 거듭하며 240장에 이르는 대작 리포트를 작성 중이다. 미즈오 씨 역시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주인공의 생일에 죽음의 순간을 정리한 책을 선물한다.
괴팍하고 희귀한 인종이라는 면에서는 결코 주인공에게 뒤지지 않을 교토대생들이 등장한다. 빼앗길 염려도 없는 순결에 전전긍긍하며 세계 평화와 사회질서를 위해 신작 포르노를 뒤적이는 사내들은 이 뜬세상에 도전하며 교토 거리를 활보하고,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세월을 보내지만, 누구도 그들의 고투를 알아채지 못한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은 역시나 즐겁다. 연애에 무관심한 듯 하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대학생들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고고한 척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다. 각각의 캐릭터도 특이하지만 그들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에피소드와 소재들이 많은 웃음을 준다. 무거운 주제의 책으로 복잡해진 머리와 정신을 달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좋아서 시작한 투쟁이라 해도, 때로는 지칠 때도 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우리의 위대함이 어리석은 틀에 박히기를 거부하는 거라고 큰소리치며 현혹시키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러나 때로는 틀에 박힌 행복도 좋다고, 우리가 중얼거린 적도 있지 않을까.]

 

[연애는 어디까지나 배은망덕한 기쁨이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며, 가능하다면 남의 눈을 피해 맛보아야 할 금단의 과실이다. 그것을 마치 인생에 당연히 열리는 과실인 양 장소를 안 가리고 먹어 대고, 과즙을 남에게 튀겨 대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인식해야 마땅하다.
만천하에 우글거리는, 팔짱을 낀 남녀들에게 고하노라.
“살아가라, (그러나 조금은) 부끄러운 줄 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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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3 - 법정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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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럽지만 안쓰럽다. 뿌듯하지만 씁쓸하다.

 

[재판이 어차피 시작된 이상 학교라는 '체제'가 매스컴 배제에 착수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증인이로 나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체제'에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리라. 어느 틈에 이시카와 학부모회 회장에게 잽싸게 들러붙은 모기 에쓰오도 그렇고, '어른'들은 무슨 행동을 할지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다. ]

 

이 책엔 쓸모있는 어른이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의지하고 믿을만한 어른이 없다. 학교만 보더라도 '교육자'와 '월급쟁이' 사이의 어디쯤 존재하는 선생님들만 가득하다. 쓰자키 교장이 '지각창'의 존재가 학교를 감옥이 아니라 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아이들에게 이번 재판은 음흉하고 꿍꿍이로 가득찬 어른들을 배제하고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사건을 대면하는 계기이자 장치가 되어준다. 많은 소문이 있었고 미디어의 보도도 있었다. 선생님들의 설명도 있었고 경찰과 주변 어른들로부터 들은 단편적 정보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직접 마주하는 진실은 다르다.

 

[ "그러니까 이제 와서 미야케가 무슨 말을 하든 놀랄 것 없었어. 그런데 역시 소문으로만 들을 때랑은 전혀 다르단 걸 깨달았어. 정말, 진짜로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까 전혀 달랐어." ]

 

정직한 열정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지금까지 검사측, 변호사측 및 재판 관계자들이 노력하고 애쓴 시간에 대한 결과물이 법정에서 하나둘 드러난다. 앞서 두터운 2권의 책에서 묘사된 이야기들이 증언으로 다시 한번 반복되고 반전의 내용도 이미 짐작되었던 그대로 흘러가지만, 진실을 알고자 하고 누군가를 믿고자 하는 마음에 따라 무엇이 드러나는지 알게 된다면 페이지를 허투루 넘기게 되진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소설이나 영화와 다르다. 뛰어난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는 경우도 드물고 신이 보내준 듯한 증인이나 목격자가 나타나 예정된 결과를 뒤집는 일이 일어날 확률도 희박하다. 그건 단지 지저분한 싸움이고 관계자 모드를 상처 입히고 끝이 나더라도 승리의 영광이나 잔실의 빛 따윈 남지 않는다. 미스터리계의 대모인 미미여사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 극적으로 표현해 낸 것 같다. 진실을 밝힐 유일한 방법인 재판은 아이들의 힘과 손에서이루어졌으며 그 어떤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처벌이나 제재를 가할 수가 없다. 그냥 아이들은 진실을 직시하고 납득할 뿐이다. 간바라 가즈히코의 말처럼 득 될 게 없다. 다만, 사죄해야 할 사람에게 사죄 할 기회를 주고 용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용서할 기회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너무 일찍 최악의 방법으로 추접스런 어른들의 모습과 지저분한 사회의 속성을 맞닥뜨렸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어른도 못 되었다. 자신의 나이보다 조금 더 늙어버린 얼굴을 갖게 된 아이들에게 학교도, 사회도, 어른도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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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2 - 결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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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알라딘 책소개 중 발췌

가시와기 다쿠야의 죽음으로부터 반년이 흐른 여름, 일련의 소동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의문의 고발장이 불러온 파장, 학교 측의 책임을 추궁하는 매스컴, 그리고 불량학생 오이데 슌지의 수상쩍은 가정환경.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이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봐온 여학생 후지노 료코는 당사자인 자신들의 힘으로 직접 진실을 알아내기로 결심하고, 여름방학중 오이데 슌지를 피고로 세워 전대미문의 교내재판을 열 것을 제안한다. 그런 그녀 앞에 다쿠야의 옛 친구라는 낯선 소년이 재판의 변호를 맡겠다며 나서고, 새로운 증언이 하나둘 등장하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사건 당일의 광경이 조금씩 드러난다.]

 

이 책은 읽기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유독 차근차근 천~천히 진행되는 까닭이다. 사람이 갖는 생각과 그것이 형태를 갖추어 입 밖으로 나오고 그 후 행동으로 나타나기까지의 과정들이 정말 세밀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그러할진데 하물며 아직 자신과 세상에 대해 확고찬 가치관을 갖추지 못한 중학생에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갈 것인가. 물론 되는대로 내뱉는 이도 존재할 것이고,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온갖 생각을 머리속으로 떠올리다 말을 삼키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생각한 후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이도 있을 것이고 큰소리로 말 할 자신도 참을 자신도 없어 누군가가 알아채주길 바라며 나즈막히 중얼거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나이가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중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진 죄로 정확한 사실을 전달받지도 일의 경과를 듣게 되지도 못한다. 그 의도가 보호이든 무시이든 아이들은 이런 상황이 지긋지긋해졌다. 더 이상 어린 나이와 중학생이라는 신분을 핑계로 외면당하기 싫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제도인 "재판"이라는 형식을 빌어 스스로 납득할 진실과 사실을 알아내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지위, 사회적 시선 등을 이유로 모든 것을 대충대충 덮어버리려 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언뜻보면 아이들 쪽이 어른들보다 대화를 풀어나갈 자세를 갖춘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열세이자 약자인 아이들에겐 당연한 그리고 유일한 해법일지도 모른다.

 

죽은 이도 동급생이고, 고발장을 쓴 이도 동급생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어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 한 진실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미여사는 다양한 표현을 동원해서 아직은 여리고 약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대변하고 이는 읽는 이에게 또 다른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진짜와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게이코도 입을 다물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이런 난문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가능한 한 함께 의논하란 거야." 기타노 선생이 말했다. "진짜 재판처럼 검사 측과 변호인으로 갈라져서 자기주장만 하다보면 결론이 안 나. 너희는 아직 중학생이니까."
"서로 협력하라는 뜻이죠?"
"그렇지. 터널 파는 거나 똑같아. 좌우에서 동시에 파기 시작해 한가운데서 만나는 거야."
그 한가운데 진상이 있을 거라고 기타오 선생이 낮게 말했다. ]

 

[하시다는 뭐랄까-늙었다.

어른스러운 게 아니다. 그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지친 듯한, 권태로운 듯한 이 묵직한 분위기는. 이녀석 허리가 이렇게 굽었던가. 그래도 나보다는 훨씬 키가 크지만.

"교내재판 여는 거 모르니? 편지가 왔을 텐데."

가즈히코가 작은 새처럼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수도꼭지에서 계속 물방울이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는 본 척도 하지 않던 하시다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긴 팔을 뻗어 싱크대 수도꼭지를 꽉 잠갔다. 수도꼭지가 죄송스럽다는 듯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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