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곳은 신비한 곳이야, 다니엘. 일종의 성전이지.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 벌써 오래 전에 아빠의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도 이곳은 이미 오래된 곳이었지. 아마 이 도시가만큼이나 낡았을 거야. 이곳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누가 이곳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 네 할아버지가 내게 말슴하셨던 걸 네게 알려주마.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있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찌. 가게에서 우리는 책들을 사고 팔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여기서 네가 보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겐 가장 좋은 친구였었지. 지금은 단지 우리들만 있지만 말이다. 다니엘, 이 비밀을 지킬 수 있겠니?"

- p. 14 ]

 

[ 유년기의 함정들 중의 하나는 느끼기 위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성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이미 가슴속의 상처가 지나치게 깊어진 후다. - p. 58 ]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기분 나빠 하지마, 하지만 여자는 가끔씩 자기아 아는 사람에게보다는 모르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더 자유로움을 느끼거든. 왜 그럴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모습이 아닌 우리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 거야."

- p. 283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읽은 줌파 라히리의 2번째 책이다. 그녀의 책은 모난 데 없이 차근차근 흘러가다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한 방이 있다. 일상의 잔잔한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절대로 식상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반복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그런 삶을 묘사한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집이나 인물들이 걸치고 있는 옷, 먹고 마시는 음식에 대해 자세히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네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하나하나 설명하지도 않는다. 결코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직장 동료의 집들이에 초대되어 예의상 둘러보는 집안 풍경처럼 무심한 듯한 구석이 있다. 그러다 독자가 마음의 빗장을 풀고 모든 긴장을 내려놓을 즈음에 심금을 건드리는 부분이 튀어나온다.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맞닥뜨리는 순간인지라 감동은 두배다. 번드르르한 말빨로 채워진 것도 아니고 알만한 수작을 화려한 미사여구로 감춘 문장도 아니다. 투박하다싶게 다듬어지지 않았고 거칠다 싶게 솔직하다. 무뚝뚝하고 말 수 적은 경상도 남자가 의외의 순간에 입을 열어 몇마디 한 게 마음에 와닿고 그래서 더욱 진실되게 느껴지는 그런 거??

 

단편집의 특징상 마음에 드는 작품과 덜 드는 작품이 존재한다. 표제작인 [축복받은 집]은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것은 책의 첫번째와 마지막 이야기였다. 순위를 매긴다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 > 잠시 동안의 일 > 피르자다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 > 섹시 > 센 아주머니의 집 > 진짜 수위(두르안) > 축복받은 집 = 질병의 통역사 = 비비 할다르의 치료기

 

책을 읽으면서 특히나 좋았던 부분은 따로 발췌해서 이곳에 옮겨 두곤 한다. 후에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아, 이런 구절이 있는데 어느 책에 있었더라... 하는 경우도 있고, 그 책에 그런 표현이 있었지... 하면서 떠오를 때 찾아보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줌파 라히리의 책에서 그런 부분을 옮긴다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하고 낯간지럽다. 이 부분 진짜 좋다~ 하면서 읽었는데도 막상 옮겨두려고 보면 뭔가 너무 평범하고 특별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면서 잠깐씩 마음에 묵직하게 다가오는 감정의 파도를 겪는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자연스레 잊고 살아간다. 작가는 그런 순간을 별 것 아닌 냥 툭 던져놓기에 날아온 돌멩이에 퍼져나가는 연못처럼 가슴 떨리다가 잠시 뒤면 진정된다. 이런 순간들이 살아가는 데에 작은 미소와 위안을 주고 잊혀지듯이 줌파 라히리의 소설 속 문장들도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까마귀 1
마야 유타카 지음, 하성호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작가의 전작인 [애꾸눈 소녀]를 썩 재미나게 보지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에 뒤떨어진 고립된 마을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신의 존재 등의 소재를 좋아하는 터라 혹시나 하면서 또 읽었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혹시나~ 했던 일들은 언제나 역시나~ 로 끝난다.

 

 

일단 시작은 괜찮았다. 소재도 배경도 좋고 형제의 갈등이란 측면도 좋았으며 차분하게 진행되는 주인공의 시점도 괜찮았다. 깔아놓은 밑밥에서 야기되는 스산함이나 괴기스러움, 흥미진진한 전개는 아닐지라도 주인공의 심리적인 캐릭터를 잘 드러내주는 문장이나 이야기들이 책을 계속 읽어나가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2권으로 넘어가면서 실망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상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흩어놓은 단서들을 한데 묶지 못 했고,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이란 것도 늘어난 고무줄같이 맥아리가 없고 녹아버린 팥빙수의 마지막처럼 싱거웠다. 애초에 메르카토르라는 캐릭터의 등장이나 카인과 아벨이라는 거창한 이름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작가가 본인의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 할 과대포장을 한 듯 했는데 이 역시 맞아떨어진 것이다. 사건이 벌어지는 내내 텍스트화 된 범죄들이 독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하지 못 하고 등장인물들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는 순간에도 조여오는 듯한 긴박함 한조각조차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고립된 마을의 정서나 유일무이한 절대권력 신앙의 존재 등에 대한 부분을 줄이고 형제의 갈등에서 비롯한 심리적인 면에 추점을 맞추는 편이 나았다. 사실 그게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하고 말이다.

 

 

전작에서도 느낀 바 있지만 마야 유타카라는 작가는 사건성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 인물에 비중을 두는 스타일로 작품을 쓰는 게 나을 듯 하다. 내내 그렇게 진행해 오다가 책 후반에 이르면 그동안 작가가 읽어왔던 많은 장르소설의 그것처럼 마무리를 지으려 하니 힘 빠지는 결말이 되고 만다. 김전일이나 긴다이치 코스케처럼 충격적인 결말을 밝히며 마무리를 지으려 하는 듯 한데 마야 유타카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서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보는 게 맞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줄리언 웰즈의 죄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5
토머스 H. 쿡, 한정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참 괜찮은 작품을 읽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좋아~ 식의 느낌이 아니라 괜찮네, 괜찮어... 하는 느낌... 서점 가판대의 스테디셀러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을 법한 책이 아닌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고전 문학을 읽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이거나 내 가방 속에서 들어있는 책등의 제목을 드러내게 된 순간에 괜한 자부심과 지적 허세를 부릴 수 있을 법한 그런 작품이다.

 

 

토머스 H. 쿡의 작품이 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특유의 표현들과 타 문학작품 속의 소재, 인물 등이 자주 등장하며 역사적 사건이나 장면 등에 관한 것도 자주 등장하여 내 지식과 앎을 테스트 당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 문학적이라는 평을 듣는 작품의 경우 의외로 진입장벽이 높은 경우가 꽤 있었다. 비비 꼬인 표현이나 추상적이고 복잡한 수식들, 이 정도의 문턱은 넘어야 내 글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다는 작가의 언어 과속방지턱이 산재해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작가의 경우 내가 한번은 겪었음지간 순간, 상황,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몰라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감정들에 대해 적절한 단어와 문구로 그래, 이런 거였어~ 하는 통쾌한 후련함과 만족감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줄리언이나 필립과 같은 캐릭터나 환경이 나와 일치하거나 비슷한 부분도 없어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편안히 읽히고 일상에 파고든다. 책의 절반 아니 2/3가 지나도록 새로운 발견이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친구의 일기나 가족의 다이어리를 읽는 듯 익숙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금방 빠져들어 버린다.

 

 

이 작가의 전작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괜찮은 문장들과 장면이 얼마나 많은지 따로 페이지를 마련해서 적어두어야 하나...싶을 정도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 작가의 뛰어난 재능과 그것을 자연스레 표출하는 능력에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지체되다’라는 말은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는 예스러운 단어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버리는 것은 언어를 신조어의 변덕에 내맡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옛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새것은 오직 옛것을 통해서만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할 때 특별히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태도를 보더라도 5센트짜리 시가가 사라진 것을 개탄하는 까다로운 노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옛 가치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투 그로브즈의 서재에서 줄리언과 함께 시가를 피우고 포트와인을 마시던 저녁마다 줄리언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위대한 지성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크라테스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지혜로워지고 싶어 하는 바람은 지혜 그 자체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선량함을 언제나 높이 샀다. - p.33

 

 

 

인간은 가슴에 품은 의문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설정되는데, 나는 줄리언이 알고 있었던 것은 어둠뿐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에 자꾸만 의문을 제기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 p.41

 

 

 

위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항상 아름답고, 그녀를 잃은 남자는 지독히도 괴로워한다. 스파르타의 성벽 위를 거닐던 헬레나가 그 빼어난 미모로 두 적국의 군인들을 모두 눈부시게 만든 이후로 우리는, 적어도 문학작품에서는, 평범하게 생긴 여자에게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 p.90

 

 

 

로레타가 미소를 지었다. “줄리언 오빠는 뭘 찾는지 모를 때 더 많은 걸 찾게 된다고 했어.”

- p.104

 

 

 

순교가 성인다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야망의 소산일 때가 있는데,, 줄리언도 가끔씩 좋은 일이라도 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이타적 행동에 무모하게 빠져든 것은 아니었을까? - p.140

 

 

 

"줄리언은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들이 감방 벽에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많이 써놓은 단어가 있다고 했네.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어, 어머니나 아버지, 하느님 같은 단어가 아니라고 했지.“ 에두아르도는 또 내 오랜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쳄’이라는 단어였네.“

“자쳄이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왜’라는 뜻이지.”에두아르도가 대답했다. 당혹스럽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말이 줄리언의 마음에도 쓰여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배신이 적어놓은 단어라는 생각도 들고.” - p.151

 

 

 

내 기억으로는 책에서는 그 장면이 훨씬 더 길고 더 자세하게 표사가 되어 있었는데, 다시 보니 줄리언은 그 장면을 짧게 묘사하고는 곧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가하는 고문이 주는 공포는 더 끔찍하다는 사실에 대한 단상으로 넘어갔다. 여성은 주로 위로하는 쪽이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선입견이 돌연히 그리고 끔찍한 방식으로 깨어질 때 그 공포와 시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고 말했다. - p.181

 

 

 

“지금 너, 내가 널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 알아?” 내가 로레타에게 말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아냐, 진짜.” 내가 말했다. “인간이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 반사반응은 두려움이라고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네 경우엔 그게 호기심인 것 같다.”

그녀는 잠깐 나를 물끄러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있잖아, 필립 오빠. 지금 그 말,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것 중에서 최고의 찬사인 것 같아.” - p.270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이나 지하철역 주변에 빈민들이 모여 있는 건 어디나 다 마찬가진가 봐.“ 로레타가 말했다. ”줄리언 오빤 그들이 탈출구 주변을 무의식적으로 맴도는 것 같다고 했었어.“ - p.271

 

 

 

오래전에 로레타가 한 말이, 줄리언이 숲에 조약돌을 던져 길을 만들어갔고 그 길이 그를 더 많은 조약돌한테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로레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 p.278

 

 

 

적절한 때에 좋아하는 사람이 질문을 하면 깊은 속마음도 드러내보이게 되는 모양이다. - p.2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계 재판 -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2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 방청석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분명 법률적으로는 이 행위는 '정교'라는 한 마디로 몰아붙여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피고인의 이 고백 속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인생'이 있었다. 물론 특이하기 그지없는 상태였지

만 그래도 생명을 지니고 유전하는 인간의 생활을 법률적인 칼날로 도려내려다 보면 이런 종류의 오해

가 도처에서 발생한다. - p.273 ]

 

법정물...이라고 하나... 그런 류의 영화나 책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숨겨진 사실들이 밝혀지고 뛰어난 실력의 변호사가 거짓을 얘기하는 증인에게 질문을 퍼 붓다가 진실을 토해내게 만드는 그런... 재판 막바지에 가까스로 법정에 뛰어들어온 조력자로부터 건네진 귀중한 증거자료로 판을 뒤집거나, 변호사의 혹은 피고의 감동적이고 진실된 호소에 판결이 결정나는... 물론 배심원제로 진행되는 미국의 법정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증인, 증거의 신청 및 제출은 사전에 미리 서면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심문 때 사용되는 질문 역시 사전에 미리 제출되어 상대방도 모두 알 수 있다. 극적인 역전이나 드라마틱한 전개는 결코 없다. 그래도 역시 이런 류의 이야기는 몹시도 매력적이다.

 

미스터리라는 장르는 로맨스, 액션, 첩보 등 그 어떤 형식을 가져다 끼워맞춰도 가능한 분야이다. 그 때문에 다양한 재미와 버라이어티한 전개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법정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의 미스터리라... 자극적인 제목과 호기심을 일으키는 표지에 솔깃했다가 되려 실망감이 커질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단지 우려였다. 쫓고 쫓기는 추적씬이 없어도, 이리저리 헤매며 증거를 찾고 목격자를 물색하는 장면을 빼고도, 고독하고 매력적인 주인공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이 증명했다. 사람의 진실은 결코 예, 아니오로 대변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사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고 있고 확인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인은 잡혀서 벌을 받고 피해를 당한 이는 억울함을 풀어주고 고통받는 이가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결과임을 믿고 기대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스타일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

 

법정 미스터리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은 별개로 하고 진실을 쫓는 변호사, 경찰 등이 활약하는 법정 뒤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거기에서의 법정은 그냥 모든 진실을 밝히는 무대로서의 역할에 한정되었었지만, 이 책은 시작도 끝도 법정이 전부다. 이야기 자체도 괜찮았지만 이런 시도를 하고 또한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작가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