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줄리언 웰즈의 죄 ㅣ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5
토머스 H. 쿡, 한정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참 괜찮은 작품을 읽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좋아~ 식의 느낌이 아니라 괜찮네, 괜찮어... 하는
느낌... 서점 가판대의 스테디셀러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을 법한 책이 아닌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고전 문학을 읽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이거나 내 가방 속에서 들어있는 책등의 제목을 드러내게 된 순간에 괜한 자부심과 지적 허세를
부릴 수 있을 법한 그런 작품이다.
토머스 H. 쿡의 작품이 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특유의 표현들과 타 문학작품 속의 소재, 인물 등이 자주 등장하며 역사적
사건이나 장면 등에 관한 것도 자주 등장하여 내 지식과 앎을 테스트 당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
문학적이라는 평을 듣는 작품의 경우 의외로 진입장벽이 높은 경우가 꽤 있었다. 비비 꼬인 표현이나 추상적이고 복잡한 수식들, 이 정도의 문턱은
넘어야 내 글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다는 작가의 언어 과속방지턱이 산재해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작가의 경우 내가 한번은 겪었음지간 순간,
상황,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몰라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감정들에 대해 적절한 단어와 문구로 그래, 이런 거였어~ 하는 통쾌한 후련함과 만족감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줄리언이나 필립과 같은 캐릭터나 환경이 나와 일치하거나 비슷한 부분도 없어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편안히 읽히고
일상에 파고든다. 책의 절반 아니 2/3가 지나도록 새로운 발견이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친구의 일기나 가족의 다이어리를 읽는 듯
익숙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금방 빠져들어 버린다.
이 작가의 전작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괜찮은 문장들과 장면이 얼마나 많은지 따로 페이지를 마련해서 적어두어야
하나...싶을 정도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 작가의 뛰어난 재능과 그것을 자연스레 표출하는 능력에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지체되다’라는 말은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는 예스러운 단어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버리는 것은 언어를 신조어의 변덕에 내맡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옛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새것은 오직 옛것을 통해서만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할 때 특별히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태도를
보더라도 5센트짜리 시가가 사라진 것을 개탄하는 까다로운 노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옛 가치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투
그로브즈의 서재에서 줄리언과 함께 시가를 피우고 포트와인을 마시던 저녁마다 줄리언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위대한 지성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크라테스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지혜로워지고 싶어 하는 바람은 지혜 그
자체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선량함을 언제나 높이 샀다. - p.33
인간은 가슴에 품은 의문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설정되는데, 나는 줄리언이 알고 있었던 것은 어둠뿐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에 자꾸만 의문을 제기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
p.41
위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항상 아름답고,
그녀를 잃은 남자는 지독히도 괴로워한다. 스파르타의 성벽 위를 거닐던 헬레나가 그 빼어난 미모로 두 적국의 군인들을 모두 눈부시게 만든 이후로
우리는, 적어도 문학작품에서는, 평범하게 생긴 여자에게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 p.90
로레타가 미소를 지었다. “줄리언 오빠는 뭘
찾는지 모를 때 더 많은 걸 찾게 된다고 했어.”
- p.104
순교가 성인다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야망의
소산일 때가 있는데,, 줄리언도 가끔씩 좋은 일이라도 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이타적 행동에 무모하게 빠져든 것은 아니었을까? - p.140
"줄리언은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들이 감방 벽에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많이 써놓은 단어가 있다고 했네.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어, 어머니나 아버지,
하느님 같은 단어가 아니라고 했지.“ 에두아르도는 또 내 오랜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쳄’이라는 단어였네.“
“자쳄이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왜’라는
뜻이지.”에두아르도가 대답했다. 당혹스럽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말이 줄리언의 마음에도 쓰여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배신이 적어놓은
단어라는 생각도 들고.” - p.151
내 기억으로는 책에서는 그 장면이 훨씬 더 길고
더 자세하게 표사가 되어 있었는데, 다시 보니 줄리언은 그 장면을 짧게 묘사하고는 곧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가하는 고문이 주는 공포는 더
끔찍하다는 사실에 대한 단상으로 넘어갔다. 여성은 주로 위로하는 쪽이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선입견이 돌연히 그리고 끔찍한 방식으로 깨어질 때
그 공포와 시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고 말했다. - p.181
“지금 너, 내가 널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 알아?” 내가 로레타에게 말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아냐, 진짜.” 내가 말했다.
“인간이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 반사반응은 두려움이라고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네 경우엔 그게 호기심인 것 같다.”
그녀는 잠깐 나를 물끄러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있잖아, 필립 오빠. 지금 그 말,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것 중에서 최고의 찬사인 것 같아.” - p.270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이나
지하철역 주변에 빈민들이 모여 있는 건 어디나 다 마찬가진가 봐.“ 로레타가 말했다. ”줄리언 오빤 그들이 탈출구 주변을 무의식적으로 맴도는 것
같다고 했었어.“ - p.271
오래전에 로레타가 한 말이, 줄리언이 숲에
조약돌을 던져 길을 만들어갔고 그 길이 그를 더 많은 조약돌한테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로레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
p.278
적절한 때에 좋아하는 사람이 질문을 하면 깊은
속마음도 드러내보이게 되는 모양이다. - p.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