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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
장-폴 디디에로랑 지음, 양영란 옮김 / 청미래 / 2014년 9월
평점 :
이 책에 대한 나의 기대는 고만고만했다.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책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작가는 문학상 수상자인지라 손해 보진 않겠네, 싶은 그 정도였다. 같이 장바구니에 담아 결재한 다른 책들보다 내 관심을 덜 받았고 뒤늦게 읽게 되었다. 보석은 진흙 속에 있고, 파랑새는 늘 가까이에 있으며, 진실은 내 안에 있다는 식상한 얘기들처럼, 이 책은 다른 평범하고 무시해도 좋을 법한 책들과 함께 전혀 튀지 않게 내 침대 옆에 쌓여있었다. 내 인생,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을만한 작품을 오늘, 그곳에서 발견했다.
232쪽에 이르는 책은 버릴 페이지가 단 한장도 없었다. 불필요한 문장이나 쓸모없는 단어도 역시 없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주인공의 고독과 외로움이 전해지고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본인의 직업에 대한 혐오감이 물씬 풍겨왔으며 굳이 웃기려 하지 않아도 유머러스하며 느끼하게 굴지 않아도 충분히 달콤하다. 와~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적절한 번역도 한몫 했음이 분명하다만, 이는 원작이 우선적으로 탁월한 덕이 분명하다.
길랭은 재고가 된 책들을 파쇄하는 일을 하는 남자다.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이 작업은 그를 너무 괴롭게 하고 파쇄기는 그에게 살인자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재고처리 된 책들을 파쇄하여 종이죽 형태로 만들고 이는 다시 펄프로 가공되어 새로운 책이 인쇄된다. 하루종일 파쇄 업무를 하고 마지막으로 파쇄기 안을 청소하면서 파쇄 중 떨어져 나간 낱장을 주워모아 다음날 출근길 6시 27분 전철 안에서 낭독한다. 길랭이 읽는 낱장들은 파쇄 중 어느 것인지 모를 책에서 떨어져 나간 일부분인지라 결코 이야기가 연결되지도 않았고 분야도 그때그때 달랐다. 어떤 날은 스릴러의 한 부분이, 다른 날은 오래된 전통 스프 제조법에 관한 설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길랭도, 전철 안에서 그의 낭독을 듣는 사람들도 어느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기다렸으며 기뻐했다. 길랭의 낭독은 책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슬픔이나 직업이 주는 괴로움 등 그 어떤 것을 증명하거나 보상하기 위함이 아닌 듯 하다. 그 낱장들은 살아 숨쉬던 이야기들의 파편으로 한 때나마 분명히 책이라는 형태로 존재했었음을 기억하고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에는 없는, 동양에만 존재하는 제사나 참배의 의미처럼 말이다.
그에겐 '루제 드 릴'이라는 금붕어 한마리와 모든 대화를 12음절 정형시로만 말하는 직장 동료, 그리고 오래전 파쇄기에 두 다리를 절단당한 회사 선배가 친구로 있을 뿐이다.
길랭이 일하는 회사는 점심 시간동안 업무를 중단한다. 소음과 파쇄 중 발생하는 먼지로 주변 이웃들에게 발생할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파쇄할 책들을 가득 싣고 온 새로운 신참 트럭 기사가 점심 시간 중임에도 차단기를 열고 통과시켜 달라고 생떼를 쓰자 12음절 정형시로만 말하는 회사 경비원 이봉은 이렇게 대꾸한다.
[ "정오가 지났네, 벽시계를 보게.
큰 바늘이 벌써 반에 다가섰지!
무례함을 접고, 경멸을 거두게,
내가 자네에게 이 문을 열어줄
아주 작은 기회, 아직 남았으니." - p. 45
" 많은 기사들이 내 노여움 사지.
때맞춰 오게나, 온화함 보리니.
짐 내리고, 사나운 얼굴을 접게.
지각이 초래한 심란함 지우게.
다음엔 정해진 시간을 지키게.
내 인내심 바닥나게 하지 말게.
시간 지났는데, 새 짐 인수하는
것처럼 모욕적인 일은 없으니.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말게.
고운 치장 밑에 악녀가 숨었네.
내 비록 하인이라 하나 어쨌든
여기선 당신 운명의 주인이네!" - p. 47 ]
얼마나 멋진가. "점심시간인 거 안 보여, 저리 꺼져!" 라고 하지 않고 저렇게 대꾸하는 경비원이라니. 원작엔 12음절 정형시, 특히 각운을 세밀히 맞춘 단어의 조화까지 속속들히 느낄 수 있을테니 더 기가 막힐텐데, 직접 보지 못해 아쉬워 죽겠다. 택시기사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부분 역시 멋지다.
[ "용감한 마부시여, 달리시게나,
우리를 무사히 데려다주시게.
전문가 손길로 마차를 몰게나.
아주 민첩하고 신속하게 몰게,
모든 구멍과 돌부리는 피하게.
황금이 달렸으니 제발 달리게." - p. 206 ]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과거 길랭의 회사 선배였던 쥬세페가 현역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OFF 상태인 줄 알았던 파쇄기가 갑자기 시동이 걸려 내부 청소를 하던 쥬세페의 다리와 책들을 함께 파쇄하여 종이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길랭에게 파쇄기 체르스트로는 살인자와 동급이 되었다. 다행히 쥬세페는 보상금을 많이 받아 편안히 살게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요상한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쥬세페의 다리와 함께 종이죽이 되어 펄프로 탄생한 그 종이에, 정확히는 2002년 4월 16일 그 회사에서 생산된 제지 펄프에 '장-외드 프레시네'라는 사람의 [지난 시대의 정원과 텃밭]이 인쇄되어 책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쥬세페는 자신의 살과 피가 섞인 [지난 시대의 정원과 텃밭] 전권을 다 모으면 자신의 잃어버린 다리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길랭은 쥬세페가 삶의 의욕을 잃지 않도록 그의 뼈와 살이 담긴 책 1,300권을 모두 모으는 일을 돕게 된다.
길랭은 언제나처럼 앉는 전철 자리에서 USB 하나를 줍게 된다. 그 USB 안에는 대형 쇼핑몰의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한 여자의 자전적 소설이 들어있었다. 길랭은 다음 날부터 전철과 요양원에서 그 이야기들을 읽어나갔고, 그런 길랭을 보고 쥬세페는 그가 처음으로 뭔가 몰두할 것을 찾았다며 좋아한다. 종일 작업에 시달리는 길랭을 위해 쥬세페는 소설을 낱낱히 분석하여 소설 속의 여자가 일할 것 같은 쇼핑몰을 추려내고 길랭은 그녀를 찾아나선다.
단순히 길랭이 그녀를 찾아내 사랑에 빠졌다해도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다시 한번 독자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다. 길랭은 그녀에게 섣불리 접근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언급된 그녀의 사소한 습관, 숫자가 지닌 이미지에 관한 생각, 의미있는 날에 행하는 것들을 완벽히 파악한 후 그녀가 그에게 연락할 수 밖에 없을 법한 근사한 러브레터를 꽃다발과 함께 보낸다. 편지를 읽는 내내 그 어떤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더라도 나올 수 없는 웃음이 계속 나더라. 이건 길랭이 대단한 건지 아님 작가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다. 그 편지를 보고 넘어오지 않을 여자가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완벽한 짝, 나의 반쪽이란 유치찬란한 문구를 쓰지 않아도 이렇게 멋드러지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이 사람은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편지의 전문을 이곳에 옮겨 두고 싶지만, 혹시 내 글을 먼저 읽고 책을 나중에 찾아볼 이들을 위해 참으려 한다. 와~ 좋은 책을 읽어 너무 행복하다. 텍스트 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니, 제발 아무에게나 말고 이런 사람에게만 작가란 타이틀을 허락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