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 귀신과 通하다 - 조선에서 현대까지, 귀신론과 귀신담 조선의 작은 이야기 1
장윤선 지음 / 이숲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의 선비, 귀신과 通(통)하다 - 조선에서 현대까지, 귀신론과 귀신담>




우리는 모두 삶이 좀 더 의미 있기를 바란다. 단 한순간이라도 헛되이 살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망과 의지, 자유와 쾌락을 향한 꿈이 귀신을 논한 수많은 담론 속에 녹아 있다. 그래서 귀신을 논하는 것은 의미 있고, 귀신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귀신은 영원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살아남을 것이다. p271




학부 시절, 민속학 수업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만신 김금화 여사의 진혼굿 영상을 본 일이 있다. 사실 무속이란 것은 미신이라고 치부하고 말았던, 나였지만, 그 영상을 보고, 무속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와 같은 뭇사람들은 무속이나 귀신에 대해 미신이라 치부하며, 반신반의하며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있다고, 혹은 없다고, 증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종교와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독신(瀆神)일지도 모른다.

민속학을 배우며, 가장 많이 느낀 점은, 무속이란 것은 우리의 오랜 민속신앙이었다는 점이었다. 책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고대는 제정일치의 시대였고, 그것은 ‘왕은 곧 무당’(p41)이라는 뜻이다.




단군은 민족의 시조로서 신성시되는 인물이다. 그런 단군이 무당이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중략) 천부인은 잘 알려진 대로 성스러운 신분을 상징하는 부적과 같은 것이다. (중략) 신단수는 그야말로 나무이다. 보통나무가 아니라 성스러운 나무이다. p39




사실,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신화들은 무당의 신어로 전승되었고, 기록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너무도 유명한 ‘바리데기’, ‘오구풀이’이다.

그런 무속이 어쩌다, 미신으로 격하 전승되었을까?

그 첫째이유는, 유교이고, 그 둘째이유는,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문화, 즉 서학(천주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은 왜? ‘조선의 선비’와 ‘귀신’ 인가? ‘유교’의 대표인 ‘선비’와 ‘무속’의 대표인 ‘귀신’의 만남이라,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건국에 가장 큰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은 ‘사상의 변화’(p49) 즉, ‘유교’의 정치 이념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는 종교적인 개념보다 학문적인 의미가 크다. 사실 나는 ‘유교’라는 말보다 ‘유학’이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라는 것은 ‘생과 사’를 말하고, 세계를 아우르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유학’이 ‘유교’가 될 수 있었던 힘이 항상 나에겐 의문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 책을 통해, 그 의문이 조금은 풀어 보았다.




모든 사회적 억압 가운데 가장 큰 억압은 바로 억압당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중략)

사회의 모순에 희생된 이들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잘 돌아보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주 묻혀버리지는 않았으니, 바로 귀신이야기가 그 소외된 사람들의 은밀한 원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p153




어떤 사회에서나 모순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모순에 희생된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이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책의 후반부를 차지하는 ‘귀신담’의 소개는 바로 그런 이야기 들이었다.

여기서 ‘귀신담’을 이야기하기 전에, ‘귀신’이란 무엇인가를 풀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이 의문을 ‘유교’가 지배하고 있는 ‘조선’에서 찾고 있다.




‘조선’은 어떻게 ‘귀신’과 ‘통(通)하였을까?




천지 만물의 생성과 생사의 원리가 인격적 신의 손에 달렸다고 믿기보다는,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생사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나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p84




우주에는 ‘기(氣)’와 ‘이(理)’가 있다. 氣는 변화하는 것, 움직이는 것이고, 理는 변하지 않는 것, 즉 도덕이나 양심과 같이, 인간의 내부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이다. 기에는 양(陽)과 음(陰)이 있어, 그 변용으로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이 된다. 사람이 죽으면 이 기가 흩어져 소멸하게 된다. 유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원리란 이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한다. 모든 것은 기(氣), 자연적 순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바로 ‘제사’라는 조상신을 모시는 행위이다. 이것은 ‘죽어서 흩어졌던 기가 자손의 부름에 다시 모일 수 있다’(p91)고 했으며, 이는 ‘바로 자신의 기를 이어받은 자손에 의해 자신의 영속적 삶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뜻’(p91). 즉, 이는 기는 흩어지더라도 그 기운이 얼마동안 남아, 자손들이 정성을 다하면 잠시 모여, 기의 영속함, 즉 자신의 기가 자손으로 이어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런 제사를 지내는 것에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천자의 신분이 되어야 천지에 제사 지낼 수 있고, 제후의 신분이 되어야 산천에 제사 지낼 수 있으며, 대부의 신분이 되어야 다섯 곳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법이다.’(p93) 즉, ‘제사 지내는 사람과 그 대상이 신분 계층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어’(p94)있어, ‘제산의 원리가 신분제도의 차이를 합리화 하는데 쓰이는 것’(p94)이라는 아쉬움이었다.

즉, 유교는 정치적 종교적 의미로, 신분제도를 합리화하는 유용한 학문이자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귀신은 유교의 기(氣)와는 또 다른 것이다. 좀더 어둡고, 사적인 경향이 있다. 위의 유교적 이론이 ‘귀신론’이었다면, ‘귀신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귀신’과 훨씬 근접해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귀신론’에 귀신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거기에 ‘기’가 불안정한 상태의 귀신이 있다 했다.

이것은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역시, 해석불명의 무엇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피해가 있었고, 그것들을 다루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대에서 시작해, 조선을 지나, 현대까지에 이르는 귀신이란 존재는 역시나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지도, 설명이 가능하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두고, 이러이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를 가지고 가설을 세울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귀신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사랑과 대화를 원한’(p264)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여귀가 많았던 것도, 현대의 소외자들에 대한 귀담이 많은 것도. 우리가 밝은 곳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것, 그것들을 풀어낼 그릇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귀신'이라는 정체불명의 것으로 현상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두운 면을 고루 두르고, 밝힐 수 있게 된다면, 과연 '귀담'은 사라지게 될까? 생과 사 그 중간지점 어딘가에 존재하는 '귀'의 영역은, 앞으로도 많은 진의 여부와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그것들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의 무엇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어긋남에 대한 경고, 혹은 양심의 호소는 아닐런지.

 

굿당에 가보면, 무당이 가장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불쌍하다’ 혹은 ‘가엾다’이다. (중략) 신은 곧 부모의 마음을 가진 존재 일지도 모른다. 천지 만물을 안타깝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말이다. p2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