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 소담 한국 현대 소설 3
황경신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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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소리도 없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늘.. 그것은 시작되고 있다.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가슴의 통증을 느끼는가 하면.

때로는 서글픔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일도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그것.. 바로 사랑이다.

 

직접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사랑에 관한 모든 느낌들을 일렬로 세워놓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다 겪은 다음에야 '아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여지껏 만난 '황경신'은 이랬다.

언제나 한발 물러서 있는 느낌과, 내 감정도 중요하지만 남의 감정도 똑같은 무게로 생각한다.

 

17.. 숫자만 보았을때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띠지에 적혀진 내용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그냥 자잘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라고 보여졌을 것이다.

열일곱살.. 그때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한참.. 학교생활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웃고 떠들고 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여기에서의 열일곱은.. 나에게 다섯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쉬운 길은 없었고.. 다들 한번은 돌아서 만나야했던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 사랑에 두려워했던 여자,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했던 남자와 균형을 깨뜨리려고 했던 남자, 그리고 아직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던 것에 혼란스러워했던 남자..

 

첫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시에나와 니나. 순진하기만 한 니나와.. 그런 니나에게 여러가지를 알려주고자 했던 시에나.. (딱히 알려주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시에나가 있음으로써 니나는 성장했고, 니나가 있음으로써 시에나는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시에나의 친구이자 두번째 연인인 대니..

"저기.. 대니는 시에나의 연인이에요?"

"굳이 말하면 두 번째 연인이라고 해야 할까..

첫 번째라는 건 가끔 바뀌기도 하잖아. 그만큼 좋아하면, 그만큼 상처를 받기도 하니까,

어느 날 문득 감당할 수 없게 되거나 지겨워지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쳐버려.

하지만 두 번째는 늘 그 자리에 있고, 좀처럼 바뀌지도 않아."

시에나의 버팀목 같은 존재인 대니.. 그리고 시에나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알 수 있었던 대니.

이 사람들이 가장 어려웠다.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서..

이렇게까지 멀리 돌아와야 했던 사람들이라니.. 이렇게 힘들게 만나다니..

그럼에도 둘이 부러웠다.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는 마음이.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그 마음이. 언젠가.. 나도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비오는.. 니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처음은 그렇지 않았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니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갔다. 특별한 감정이라기보다.. 서투른 감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

그리고 가장 어중간한 사람이 제이였다. 감정을 정리하지도 못한채..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는데..

그 사이에.. 그걸 느끼게 해준 사람은 떠나버렸다.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할 기회도 사라져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심장같은 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난, 나 자신이 물에 흠뻑 젖은 종이처럼 느껴져요."

"햇살처럼 당신을 비춰줄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습기가 다 날아가고 나면, 최초의 그림이, 최초의 색채가 모습을 드러내겠죠."

 

"무언가가 끝나고, 무언가가 시작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어. 혹시 시에나는 그걸 알고 있느냐고, 그렇다면 가르쳐 달라고 했어. 그러자 시에나는, 너무 빨리 답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어. 어떤 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시작되어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흐르고 반복되고 또 흐르는 거라고."

 

세상에는 그런 것이 있다. 몇천년 동안이나 변하지 않는 것, 알록달록하고 투명한 것, 누구도 잡지 못한 것, 앞으로도 몇천년 동안 변하지 않을 것.

"그런 이유 때문에 무지개 같은 걸 좋아하니까, 늘 이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야, 우린."

"무엇인가가 새로 시작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상처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고, 언제나 변해버리는 것을 무서워하고, 누구도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평생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책의 끝에 다다를 무렵.. 읽는 도중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마지막에.. 그런 느낌이 들다니.. 그동안 엉켰던 실타래가 풀렸기 때문인 것일까.. 아님 원하는대로 흘러갔기 때문인것일까.. 그래도 분명한건 이 사람들이 이제 제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어지럽게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와야 할 곳에 온 것이다.

 

다시 한번 황경신이 좋아졌다.

적당한 무게감이 있는 문체와.. 직접적이지 않은 느낌들을..

나는 아마도 계속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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