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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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지킨다.'

어쩌면 생소한 이 단어들의 집합속에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삶이 농축되어져 있다.


지난해 10월이었다. 이른 아침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들렀다.

9시에 못미친 시간이었지만, 이미 줄은 장사진을 쳐 골목을

굽이 돌아, 두블럭을 뱀 꼬리처럼 이었다. 


어느 아이돌의 콘서트도 아니고, 수백년 고색 창연한 고서화의

전시회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어 기다리다니...

사뭇 놀라움과 진기함이 가득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한시간을 꿈을 꾸듯 인파에 밀려, 감상이 아닌 구경을 

하고 나온 간송 미술관은 그래서 아쉽기도 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실물 '미인도'와 혜원전신첩이라고 불리는 

혜원 신윤복의 민속화를 직접 본 경험은 신선했다. 

놀라운 색감과 더불어, 그 해학적인 의미까지 

한 장의 그림이 선사하는 놀라운 감동이었다. 


하지만 그림에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는 더욱 뜻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란 화가 신윤복이 아닌, 

소장자 간송 전형필 선생에 관한 것이었다. 


간송 전형필선생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던 1906년 생이다.

오늘날의 삼성 이재용 사장만큼이나 

순도 99.999% 은수저를 타고난 행운아이기도 하였다. 

바로 그의 조부가 조선 40대 부자에 드는 미곡상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가치로 3000억에 이르는 재산! 

그것은 만가지 근심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만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밑천이기도 했다. 

그렇게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화려한 생활에 익숙할만도 하지만

그는 고색찬연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으로 평생을 일관한다.

역사에 대한 탐독에서,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도자기에 대한 애착에서, 불상에 대한 경애감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에 불쏘시개로 사라지는 

우리의 책과 그림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렇게 관심에서 경애감으로 나아갔다.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 유개향로

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제68호 청자 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국보 제71호 동국정운 권1,6

국보 제72호 금동 계미명 삼존불

국보 제73호 금동 삼존불감

국보 제74호 청자 압형수적

국보 제135호 혜원풍속도

국보 제149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제270호 청자 모자원형연적

국보 제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그리고 보물지정 문화재 10점에 이르는 그의 컬렉션!

하지만 컬렉션의 위대함 만큼이나 지불해야하는 그의 댓가는 컸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조선의 민족혼이라고 생각할 만큼이나 아꼈던 

그의 문화재가 같은 민족에게 소실된 과정이나, 

토지개혁으로 사라진 그의 재력속에서 끝까지 지켜내고자, 

버티었던 그의 삶은 보통의 집념과 의지가 아니었음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산했던 삶의 마지막까지도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진짜 수장가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표상과 같았다. 


3000억의 재산, 조선 제일의 거부라는 세속의 평판

하지만 그는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는 인생속에서 달관과

흙으로 돌아가는 삶 속에서 그는 역사의 기억을 보관하는 자로서의 

소임을 마치고 떠났다. 


그리고 제2의 전형필을 기다리듯 우리에게 

찬연한 5월의 햇살과 바스럭 거리는 낙엽 뒹구는 10월에 

두번의 만남을 허락하고 있다.


P.S 해외 반출 문화재 11만 6896점 합법과 불법이 뒤섞인 시대의 무지속에

빠져나간 우리의 문화재 숫자이다. 그리고 지금껏 잊혀진 우리의 기억을 

찾아줄 파편이기도 하다.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제자리를 찾아 주어야 할 내일의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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