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마리 토끼전
이덕화 지음 / 천둥프레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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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님께서 남겨 주신 글 중에 바로잡고 싶은 부분이 있어 글 남깁니다(댓글 허용을 안하셔서 여기에 남깁니다).

다른 부분은 예술적 허용에 대한 경계가 서로 다른 것으로, 차치하더라도,

꾀죄죄할 일도, 부스스할 일이 없는 짐승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숲짐승, 들짐승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디폴트 값으로 ‘고’를 지닙니다. 먹이를 구해야하는 수고와 천적이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또한, 배를 계속 곯는데도 눈이 밝은 짐승은 더더욱 없습니다.
파란놀님께서 그렇게 짐승을 바라보시는 것은 짐승은 사람과 다를 것이라는 하나의 ‘상’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짐승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자연에 속해 있긴 때문이죠.
그렇기에 시인 백석은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이렇게 노래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이 이 세상에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들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앞서 말한 내용과는 별개로,
유연한 마음과 관점은, 우리를 조금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파란놀님께서 남겨주신 글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읽어주시고,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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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12-3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책비평‘ 글자락을 놓는 자리는 굳이 덧글을 안 엽니다. 덧글을 틔운 자리는 수두룩합니다. ‘다르다‘와 ‘사람‘과 ‘짐승‘을 모르시는구나 싶어서, 동화 한 꼭지를 남깁니다. 앞으로 묶을 동화책에 실을 ‘미발표작 동화‘입니다만, 맨 먼저 보여도 되겠다고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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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발바닥노래
달라


사람과 사람은 달라. 그래서 ‘나’랑 ‘너’라는 말이 있어. 사람과 사람은 다르기에 같아. 그래서 ‘나’랑 ‘너’를 더하면 ‘우리’야. ‘우리’라고 할 적에는 모두 다른 사람이 함께 있다는 뜻이고, ‘우리’라는 이름에는 ‘다 다른 나’가 ‘다 다른 너’를 바라본다는 뜻이야. 그래서 이 ‘우리’라는 말은 ‘하늘’을 가리키지. ‘하늘 = 한울(하나인 우리)’이면서 ‘하늘 = 하날(하나인 나와 날)’이거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을 못 알아듣겠지. 그러나 왼손하고 오른손이 달라서 두 손이고, 왼발하고 오른발이 달라서 두 발이야. 왼눈과 오른눈이 다르고, 왼귀와 오른귀가 다르지. 다르기에 두 손을 써서 짓고 빚고 가꾸고 심고 돌보고 일군단다. 다르기에 두 발을 써서 걷고 서고 달리고 뛰고 멈춘단다. 다르기에 두 눈을 써서 온누리를 바라보고 들여다보고 쳐다보고 지켜보고 돌아본단다. 다르기에 두 귀를 써서 귀담아듣고 귀기울이고 알아듣지.

사람이건 짐승이건 골도 왼골과 오른골이 있어. 굳이 둘로 다르게 있는 뜻을 알겠니? 몰라도 안 나쁘지만, 그저 모르는 채 있다면, 익지 않는 열매처럼 언제까지나 쳇바퀴를 돌아. 그냥 모르는 채 맴돈다면, 애벌레는 허물벗기만 되풀이하다가 죽어. 애벌레는 허물벗기를 어느 때에 멈춰. 먹기와 누기도 다 끊고서 보름쯤 깊이 잠들다가 온몸을 녹여야 비로소 날개돋이를 하지. 풀꽃나무는 애벌레가 날개돋이를 하는 날까지 기꺼이 잎을 몽땅 내주면서 기다리고 지켜본단다.

넌 사람이 왜 사람인지 아니? 모를 수 있을 텐데, 사람은 ‘살(몸)’을 입은 빛(알·씨알)이라는 뜻이면서, ‘살다(이곳에 있다)’를 나타내. 이곳 이때에 있기에 ‘살다’이고, 이곳 이때에 있으면서 숨결을 잇기에 ‘살리’는 길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스스로 알아차린다고 할 적에는 ‘익’는다는 뜻이야. 알아보려고 익어가기에 ‘읽’을 수 있고, 있고 잇고 익히며 읽기에, 새롭게 씨앗(알)을 ‘일’으킨단다. 그래서 사람이란, 살로 살며 살리고 사랑으로 가는 빛을 가리키는 이름이지.

그러면 사람하고 다른 짐승은 왜 짐승인지 알아? 모를 만한데, 짐승은 ‘짓’고 ‘지낼’ 줄 알면서 ‘지며리’ 이곳과 이때에 있는 ‘즐거’은 빛이란다. 풀하고 나무가 다르듯, 사람과 짐승이 달라. 풀마다 다 다르고, 나무마다 다 다르듯,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 넌 그야말로 모를 수 있는데, 모든 숨결은 처음에 빛이요 바람이자 씨앗이기에, 어떤 숨결도 ‘밥먹기’를 안 했어. 고기잡이짐승(육식동물)과 풀짐승(초식동물)이 없었어. 풀꽃나무도 숨결이기에, 풀꽃나무를 잡아먹는 짐승도 풀꽃나무가 바라보기에는 그저 사납단다. 넌 작은짐승이 잡아먹힐 적에는 아프다고 느껴? 넌 풀꽃나무가 잡아먹힐 적에는 안 아프니?

왜 푸른별에서 서로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지 하루아침에 다 알려줄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들려줄 수 있어. 푸른별 아닌 온누리 뭇별에서는 ‘잡아먹’지 않는단다. 빛(햇빛·별빛·바람빛)을 받아들이면 스스로 빛나거든. 빛을 받아들이니 빛나서 넉넉해. 빛이 아니라 살덩이(고기·풀·열매)를 받아들이기에 사납고 싸우고 사그라들지.

하늘은 하나(1)야. 사이를 새롭게 이으려고 자리를 내기에 ‘열’고, 열기에 ‘10’이야. 하늘로 열 줄 아는 길을 오롯이 걷기에 모두를 아울러서 알을 맺는 ‘온(100)’이라 하지. 하늘을 열고, 모두 안으면서 알아가는 길을 꾸준히 이으니 ‘즈믄(1000)’이라서 즐겁단다. 짐승이란 즈믄빛으로 반짝이는 즐거운 삶이야. 사람은 풀꽃나무 곁과 짐승 둘레에서 들숲메바다를 함께 헤아리면서 사랑이라는 빛씨를 차곡차곡 살림터에 흩뿌린단다.

넌 ‘다르다’가 무엇인지 몰라. 그런데 몰라도 되고, 모르니까 알아가면 돼. 다른 빛을 담기에 ‘닮’는다고 해. ‘닮’으니 ‘닿’고, 닿으려고 다가가고 다가와서 어느 곳에 나란히 다가서니까 ‘달’게 빛나는 숨빛을 일으켜. 섣불리 당기면 다치지. 마구마구 닥치면 괴로운 나머지 닫는단다. 다르기에 나(이곳)하고 너(저곳)를 느낄 수 있고, 다르기에 나랑 너를 잇는 길을 놓아서 다시 만날 수 있어. 둘이 서로 새롭게 닿으면서, 이 길을 즐겁게 엮으려고 ‘땋’아. 다만 너무 세게 땋으면 그만 딱딱하게 굳어 돌이 되지. 돌보고 돕고 동글동글 동무하는 두레일 적에는, 서로 두르고 둘러보며 둥글둥글 두런두런 이야기를 지펴. 그냥 돌덩이처럼 덩그러니 달린 ‘달’에는 빛이 없어.

넌 다른 줄 알고 싶어? 넌 모든 숨빛이 다 다르기에 모두 같은 빛과 씨와 별인 줄 알고 싶어? 알고 싶다면 손을 펴렴. 왼손바닥에 풀씨를 놓고서, 오른손바닥에는 나무씨를 놓아 봐. 두 마리 새가 네 왼손과 오른손에 내려앉아서 이 풀씨와 나무씨를 물어서 새삼스레 심을 땅을 살펴봐. 부디 알아보기를 바라. 제발 알아채기를 바라. 천천히 눈을 뜨렴. 차분히 귀를 열렴. 온누리는 서울에 없어. 온누리는 풀밭과 숲과 바다에 있어. 사람은 서울이 아니라, 풀밭에서 맨발로 달리고 숲에서 맨몸으로 살고 바다에서 맨손으로 헤엄치기에 사랑을 알 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