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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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일제와 해방정국, 6.25 그리고 그 이후의 보수 정권, 군사 독재 정권을 거쳐서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북한의 김씨 조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생존자’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국가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온갖 사상 검증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유령의 시간> 속 이섭의 삶은 그렇게 생존하려 애쓰다가 스러진 삶의 전형이다. 자신의 사상을 좇아 월북했던 인물이 북한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은 자신을 찾아 이미 북으로 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나 행동과는 상관 없이 외부의 폭력에 의해 사상과 사랑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노부모를 모셔야 했고, 어긋난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삶을 복원하고자 노력하지만,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편안한 자리는 없다. 현재의 자리에서 행복한 것도 옛 아내와 북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괴롭고, 행복하지 않은 것도 새로 얻은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그런 삶이다.


소설의 쓸모에 대해 고민할 때마다 이 소설을 떠올리곤 한다. 이렇듯 보편성이 있고 세세한 개인사를 기록하고 재현하는 역할을 소설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이나 철학적 문제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역사와 사회를 이루는 피와 살인 구체적 현실로 느끼려면 소설을 읽는 일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이섭은 불현듯 생각했다. 경계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증거였다. 탁 트인 저 바다는 누군가 고무보트에 몸을 실은 채 밀물을 타고 은밀히 숨어들 수도 있는 곳이 아니던가. 온몸이 떨렸다. 어쩌면, 어쩌면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바다는 잠행이 가능한 곳이었다. 누군가 이섭이 절해고도 같은 이 바닷가에 산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움이 만들어낸 상상은 날이 갈수록 견고해졌다. 이섭은 어느새 새벽마다 바닷가에 나가 혹시라도 올지 모를 그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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