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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설탕 절임 - 에쿠니 가오리 첫번째 시집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2월
평점 :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시 쪽은 평소에 읽지 않을 뿐더러,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멀리 하고 있었다. 또 멀리했던 이유중, 시집이 만원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 국내, 우리나라에 나오는 시집들은 대부분 6천원~8천원 대 사이로 조금 비싸다는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서평이벤트에 이 책이 나왔고, 그래도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응모를 했다. 그리고 결과는, 운이 좋았는지 서평단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책이 도착하자마자 꺼내 읽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점으로 보면 참 난해한 시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이건 무슨 말장난 수준이라고 느낄정도이다. 하이쿠 같은 느낌도 드는 한편, 일상에 소소한 일들을 나열한 듯한 일기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한 권을 읽어나가면서 왠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은데도 내 마음을 꽉 움켜쥐고 흔드는 구절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어 다섯살 이라는 시.
- 다섯 살 -
사탕으로 엮은 목걸이와/꽃다발 모양 초콜릿은/예쁘지도 않고/별맛도 없다는 것을/알고 있었죠/하지만/좋아했어요/사탕으로 엮은 목걸이와/꽃다발 모양 초콜릿은/사랑받고 있음의 증거/
이 시의 무엇이 그토록 나를, 며칠 내내 머릿속에 이 싯구절만을 떠올리게 하고, 무엇을 해도 이 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 것일까. 사실 한 글자 한 글자 따져서 보면 그리 대단한 싯구절도 아닌것을, 무엇때문에 나는 이 시집을 읽고 이 시만이 강렬히 머릿속에 박혀 요 며칠을 그렇게 흘려보냈는지, 참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고 1권 중간에 "나비에게 뼈대를 부여하는 것…" 이런식의 문장이 나왔었는데, 이문장을 본뒤로도 며칠 내내 이 문장이 머릿속에 남아 빙글빙글 돌아 밥 먹을때나, 무언가를 할 때마다 떠오르곤 했다. 그때마다 무기력해지던 내가, 또다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시집 전체를 평가하자면, 우선 우리나라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학도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나라 시집을 읽다가 일본시집, 하이쿠 등을 읽어보면 왠지 말장난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뭐 우리나라 국내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런 식의 글을 써서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절대 폄하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이 시집에는 정서와는 별개로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다. 사실 천천히 시 한 편씩을 뜯어보면 감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생각외로 몇 편 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인 상황들이라 더 감각적으로 느껴져간다.
달콤한 허무주의의 시.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허무주의의 시라는 의견엔 동참하지만 절대 달콤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블랙코메디를 보는 기분이 드는 시도 상당 수 있고, 꽤 여러장르를 아우르는 시들이 몇 편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절대 달콤하지만은 않다. 달콤하지만은 않기에 더 이 시집이 마음에 든다.
시 가운데 꼭 정말 에쿠니 가오리 스러운 시들이 몇 편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수도 있는데, 난 참 이 시들이 에쿠니 가오리답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작품은 다 읽어봤는데, 열 댓권이 넘는 그녀의 작품들이 꼭 이 시집에 다 들어있는 기분이다. 딱히 공통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시집하나면 왠지 에쿠니 가오리를 다 꿰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인 자만일까?
시집을 덮은 지, 이 책을 다 읽고 한번 더 읽고, 또 다시 한번 더 읽고 난 지금도, 위에 올린 다섯살이라는 시가 계속 머리에 맴돈다. 행복한 기분이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문장 뒤로는 더이상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에 다시 이런 기분을 느껴 기분이 좋다. 자, 그럼 다음은 어떤 문장이 나를 이런 기분에 빠지게 할까. 사실 하루키 이후론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그 기분을 느끼고 나니, 다음엔 어떤 문장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줄까 하고, 은근 기대감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