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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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근원을 묻다. 《한국이 싫어서》

 

아이가 태어나면 아프리카에 이민을 갈 거라고 말했던 친구를 떠올렸다. 푸른 초원에서 맨발로 자유롭게 뛰어노는 인생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에 머물렀을 뿐이다. 친구의 아이는 지금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친구는 누구하고 비교하기 어려운 극성 엄마였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정도다. 지금도 아이가 방과 후 학원순회는 기본이고, 주말에도 쉴 틈이 없이 여러 학원에 끌려다닌다. 엄마로 사는 그 친구의 갈증이 대단하다고 주변에서도 걱정이 앞섰지만, 누구 하나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동의한다는 듯이, 그런 동의로 함께 향할 곳은 행복일 테니까.

 

궁금한 건 그렇게 자란 아이가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성인으로 살아갈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거다. 완벽하게 갖춘 스펙으로 부족한 거 없이 살 수 있을지, 계속 뭔가 또 모자라서 더 채워야 하는 인생을 살아갈 것 같은 불안함. 나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주변 대부분 사람을 보면 보통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의 빡빡한 하루 일정을 보다가 나부터 답답해지곤 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건가 싶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채우고 있지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시간이 더 흘러야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는, 긍정적인 기대보다는 절망적인 몸부림이 먼저 보이는 삶의 주체인 우리의 모습이니까. 그 안에 나도 있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부르짖는데 행복하다고 말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 행복은 언제 찾아오는 건지 알 수 없을 뿐이다. 도대체 그 행복의 기준이 뭔데?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그 '정도'는 얼마만큼인데? 삼류대학을 졸업해도, 돈 좀 못 벌어도, 결혼이 좀 늦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불안은 끝도 없고, 그 불안에 위장은 늘 말썽을 부리고, 불면증은 몇 년째 나아지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나아지기는 날이 올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래서 계나의 호주행이 다른 길을 열어주는 건 아닐까 슬쩍 기대를 품기도 했다.

 

계나의 선택이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이, 대학을 거쳐 사회로 나와 부딪힌 시간이 짧지 않다. 직장생활 3년여의 세월을 지낸 계나가 한국과 맞지 않는다며 호주 이민을 결정했다. 정말 떠났다. 나는 계나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끝, 계나의 행보는 나의 예상과 달랐다. 한국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계나가 어느 나라에 있든 중요하지 않은 게 된 거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그 이후의 시간 동안 계나가 어떤 방향으로 변했느냐 하는 것만 도드라지게 보였다. 몇 년의 호주 생활을 버티면서, 한국에서와 다른 삶의 방향을 정하면서 계나가 얻은 건 행복의 기준점이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수는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160P)라고 말하는 계나의 표정을 눈감은 채로 그리고 있었다. 나는, 내 주변의 그 많은 사람은 그동안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걸까? 충분히 차고 넘치는 행복일 수 있는 상황들이 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곤 했는지, 이제야 좀 알겠다. 계나의 표현을 빌려 말해보자면,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으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풍선 같은 그릇에 터질 때까지 채워야만 한다고, 그렇게 가는 길만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던 거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계나가 찾은 게 우리가 찾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오늘의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면 내일의 삶을 떠올릴 수 있을까? 오늘이 만족스러운 순간들을 행복이라고 불러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잘 알고 있는 그게 행복인 줄도 모르고 푸념해왔던 시간이 눈앞에서 지나간다. 무슨 행복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을 '그냥 행복'인데, 지금까지 무얼 보고 살아왔던 걸까.

 

한국에서 우리가 바라는 그 행복을 찾는다는 게 희망적이지 않다는 불안은 여전하다. 계나의 선택을 보면서 그 불안이 조금 옅어졌을 뿐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수많은 '우리'가 당장 내일 계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게 달리며 열심히 살았는데도 달라질 게 없고, 계속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없다면, 여기서 행복해질 가능성은 없다던 계나의 판단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계나를 통해 이 소설이 보여준 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과 그 안에서 각자가 바라는 행복이 다름을 확인하게 하는 거다. 그런 현실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행복의 길을 여러 방향에서 찾게 한다. 여전히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고 하면서도 묵묵히 견디며 달리는 사람들과 다른 곳에 그 목적지를 두고 이 나라를 거부하는 사람들. 솔직히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찾아가는 그곳이 어디든 지금껏 알아왔던 행복의 양상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이 될 계나의 선택이 그런 의미다. 이 땅에서 조금은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직은 내일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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