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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7월
평점 :
『아무도』를 읽으며 오래전 봤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영화가 생각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감정을 나는 사랑이라 말하지 않겠다. 『멜론』은 작가가 납량 특집으로 기획했다는데 현실적인 공포라 정말 무서웠다. 손톱 옆 거스러미를 잘라내지 않고 뜯어서 결국 피가 나는 어리석지만, 그럴 수도 있는 일들 그러나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소설들을 읽었다.
_P.24
나도 당신과 공유할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 우리 둘만이 가질 수 있는 것. 우리가 나누었던 말들이나 미소나 잠깐의 체온 같은, 각자의 기억 속에서 변형되는 그런 것 말고. 둘 중 하나가 잊으면 증명 불가능한 그런 것 말고.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나도 그런 걸 갖고 싶다. 나도.
『아무도』
_P.61
아침에 눈을 뜨면 원희는 전과 달리 가볍게 일어났다. 규석에게 짜증을 내는 일도 줄어들었다. 매일 고주완의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고, 유튜브 연주 동영상이나 인터뷰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 창가에 서서, 어느새 짙어진 녹음을 보면 이유 없이 웃음이 났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들 수 있는 날이 많아졌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_P.93
구독자들은 매번 조금씩 바뀌는 제인의 필기도구와 노트 그리고 공부 내용을 궁금해했다. 제인이 입은 셔츠와 착용한 액세서리, 사용하는 립 제품의 브랜드를 묻기도 했다. 그러면 누군가 나타나 답을 했다. 아마도 어디어디 제품 같아요,라는 식으로. 구독자들은 제인이 필기하는 모습, 글씨를 쓸 때 나는 소리, 펜의 종류를 궁금해했다. 구독자들의 취향을 간파한 한나는 수익이 생긴 후 마이크를 가장 먼저 바꾸었다. 멀리 두어도 필기 소리와 숨소리까지 잡히는 성능 좋은 제품으로. 다음으로는 학용품과 소품들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카피 제품이었지만 점점 오리지널 브랜드 제품으로. 하지만 가성비 좋은 제품들을 섞어서. 대형 문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펜과 희귀하고 비싼 제품을 3 대 1 정도의 비율로. 그래야만 욕을 덜 먹는다는 것도 한나는 알고 있었다.
『제인의 허밍』
_P.131
마지막 급식소에 도착해서 사료를 채우고 물을 갈아 주었다. 이곳에는 밥그릇을 두고 갈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누군가 벽보를 붙여놓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양이 밥 주지 마시오. 걸리면 죽인다.' 그 후로 둘은 가장 늦은 시간에 이곳에 와서 고양이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후 그릇을 챙겨 왔다. 은선은 도대체 누가 그랬는지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그럼 고양이들은 어떡해? 지수가 물었고 은선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참는 거야.
『우리에게 없는 밤』
_P.194
'자본주의의 개년, 왜 사는 걸까.'
민희는 자신이 잘못 읽은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이나 다시 글자를 확인했다. 박재희는 민희가 선물한 운동화를 신은 채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은 자신의 하반신 사진과 이어서 누군가의 맨발이 찍힌 사진을 올렸다. 민희는 그 발을 쉽게 알아보았다. 익숙한 이불 모양과 자신의 발, 그리고 그 옆의 밍크 선인장.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찍은 사진 같았다. 민희는 소름이 끼쳤다. 자본주의의 개년이라니. 민희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가 점점 차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몬스테라 키우기』
_P.214
모든 식어가는 일들이 그러하듯 허공의 냉기 역시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냉기가 스친 가슴께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그때 나는 관계의 실선이 이토록 손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기다린다는 의식도 없이, 애정이 혐오로 바뀌는 이 순간을 무방비 상태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플루토, 너의 검은 고양이』
_P.230
의사는 초기 유산율이 높으니 최소 3개월 지날 때까지는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게다가 자궁경부도 매우 짧은 편이라...... 나는 고위험 임부라고 했다. 고위험. 많은 주의 사항. 조심해야 하는 것들과 하면 안 되는 것들. 특히 노산에는, 노산이라, 노산이셔서...... 노산이라는 말은 마치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데 억지로 어떻게든 낳게 해주겠으니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 내 탓이라는 말로 들렸다.
『멜론』
_P.253
노력과는 무관한 운이라는 것에 혜신은 완전히 매혹당했다. 그래서 다시 카지노에 갔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데리고 갔다. 대학 절친과도 함께 갔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거슬렸다. 그래서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홀로 카지노에 발을 들인 날에는 바카라 테이블 앞에서 여덟 시간 넘게 있었다.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셔플 타임에 혜신은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화장은 지워져 있었고 눈 밑은 거뭇했다. 이게 나인가? 이게 나......라니.
『9』
_P.320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을 했던 남자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 남자의 서랍 안에 상한 우유를 넣어두고 회사를 나왔다. 고작 상한 우유라니. 그 후로 나는 거울을 더 자주 보았다. 정말 내 얼굴에 뭔가 새겨져 있을까 봐.
『집』
_P.335
이건 내가 생각했던 죽음이 아니다. 죽는다는 건, 몸에서 생명이 사라진다는 건, 생각이나 마음 같은 것도 당연히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었던 건데......
『몸과 빛』
✦ 문학과지성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