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올라 차장 밖을 내다보니 마른 잎을 매단 가로수들이 하릴없이 서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저 사람들도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겠지? 만약 사람들의 기쁨, 슬픔, 분노 같은 모든 감정들을 한꺼번에 믹서기에 넣고 돌린다면 어떻게 될까?
자 텅 빈 하늘처럼 처연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나올까. 아무런 고민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가도 될까.
p.27
너무 애쓰지 마시라, 이런다고 이미 흩어버린 신뢰가 다시 싹틀 일은 없을 테니까.
송이는 떠나려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아빠가 손을 흔들며 어정쩡하게 따라왔다. 괜히 눈물이 핑 돌고 속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눈물을 말렸다. 물기가 배어나오지 못하게 눈뿌리에 힘을 주었다.
길가에 붉은 잎을 떨구며 서 있는 나무에 시선을 멈췄다.
큰 키에 비해 나뭇가지가 빈약하고 앙상하다, 지금 송이의 마음처럼. 딸 앞에서 쩔쩔매며 눈치를 봐야 하는 아빠, 그 아빠가 야속하고 원망스런 송이.
언제쯤이면 이 앙상하고 빈약한 관계가 다시 풍성하게 피어날까? 쓸쓸한 송이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가 휘익 지나갔다.
p.34
하늘이 조각조각, 비대칭으로 빌딩들 사이에 걸려 있다. 할 수 있다면 저 빌딩들을 걷어내고 하늘을 하늘답게 돌려주고 싶었다.
크고 넓은, 하늘다운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진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P.72
두 번 다시 엄마의 남자 때문에 울진 않을 거다. 한동안 힘들게 싸워야 하고, 서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을 때까진 막아야 한다.
이것이 지금, 송이의 절박한 마음이었다.
P.90
"할머니는 우리 송이도 자기 삶을 씩씩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어. 송이야, 너도 언젠가는 엄마한테서 독립할 때가 올 거야. 그때를 대비해서 엄마한테서 조금씩 분리하는 연습을 해야 돼.
부모 자식이라도 너무 엉켜 있으면 안 좋아. 쾌적한 거리감을 두고 제 몫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것, 그게 서로를 위하는 거야."(...)
"할머니, 난 아직 중학생이고 미성년자야. 엄마가 필요하단 말이야."
"당장은 못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미리 해야 된다는 거지. 그리고송이가 엄마를 필요로 하듯, 엄마도 필요한 사람이 있는 거야."
P.9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