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현대 편 - 대공황의 판자촌에서IS의 출현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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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현대편) / 빌포셋 외

역사의 흐름속에 위정자들의 장고끝에 결단을 내린 수많은 정책들과 결정들이 큰 역사의 흐름에 묻혀 영웅담으로 포장되거나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다. 그 이면에는 그러한 근시안적인 결정들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거나 전쟁과 희생 속에 수많은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그 순간에 조금더 숙고하고 결단을 내렸다면, 역사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다면 하는 아쉬움들이 남는 대목들이 이 책 속에 녹아있다.

현대편 흑역사는 주로 제2차대전, 베트남 전쟁, 미국의 근대사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중 짧은 나의 세계사 지식으로 알지 못했던 몇가지 흑역사를 소개한다.

스탈린의 공포정치, 군부를 의심하여 숙청하다 : 1937년

1930년대 스탈린(Stalin)은 소비에트연방엔 거센 피바람이 불었다. 비밀경찰NKVD(KGB의 전신)에 의해 수십만 명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다. 1937년 적군(赤軍)의 지휘관들이 독재자 스탈린에 항거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발견되고 1938~1939년 군부숙청 시작되었다. 숙청이 끝난 후 군대 지휘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고, 대부분 총살형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군부의 대숙청으로 적군의 전의가 상실되었고 1939년 핀란드 침공, 1941년 독일 기습공격에서 패퇴했다. 스탈린이 군대를 손대지 않고 온전히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체임벌린, 거짓 올리브 가지를 건네받다 : 1938년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총리의 제안으로 뮌헨에서 4자 회담이 성사되었다. 체임벌린, 히틀러, 에두아르 달라디에(프랑스 총리), 베티토 무솔리니(이탈리아) 4명의 참석자들은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점진적으로 합병한다는데 합의했다. 4개국 정상은 1938년 9월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영국 국민들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전쟁을 피했다는 사실에 일단 한시름 놓았고, 런던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을 뜨거운 환호로 맞아 주었다.

이듬해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침공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했다.

체임벌린은 굴욕적인 평화를 사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신했다. 만약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압박에 단호히 맞서고 그가 건넨 거짓 올리브 가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당시 프랑스든 영국이든 무력으로 개입할 조짐이 보이는 즉시 독일의 국방군 베어마흐트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수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연합군이 용기있게 대처했더라면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군해야 했을 것이다.

만약 체임벌린과 달라디에가 용기있게 나왔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완성되지 못한 마지노선, 그리고 아르덴 숲을 비워 둔 대가 : 1940년

마지노선(Maginot Line :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1927년부터 1936년까지 독일과의 국경에 설치한 대형 요새로,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Andre Maginot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마지노선의 목적은 독일군의 모든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군에게 유리한 지역으로 독일군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지노선과 벨기에 남부 방어선의 연결지점에 아르덴 숲(Ardennes forest)으로 알려진 울창한 삼림지대가 있었는데, 밀림처럼 나무가 빽빽한데다 도로사정마저 좋지 않아 대규모 군대가 진군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고, 영불 연합군은 벨리에 북부에 집중 배치되었고 남동쪽을 거의 비워두었다. 독일군은 방어가 취약한 아르덴 숲을 통해 연합군의 남동쪽을 치며 공격해왔고, 프랑스 최정예 군대와 영국 원정대는 엉뚱한 곳을 방어하다 단 수일 만에 사실상 완벽히 포위되어 치욕적인 패전의 멍에를 썼다.

잠자는 미국을 깨운 진주만 공격과 히틀러의 선전포고 : 1941년

1941년 12월 일본과 독일은 각각 실수를 저질렀다. 이 실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는 직접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벌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이 미국 본토는 고사하고 하와이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어불성설이었다.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분쇄하기 위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는 것. 그것은 미국이 전쟁에 두 발을 담그는 것을 모든 미국인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그 카드를 선택했다.

일본의 공격으로 이미 전국적으로 분노가 활활타오르던 미국에게 히틀러가 굳이 선전포고를 하는 실수를 저질러 기름을 부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승리병Victory disease이다. 프랑스, 노르웨이, 덴마크, 베네룩스 3국, 폴란드까지 커다란 피해를 입지 않고 점령했다. 그리고 소련도 독일의 전차부대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독일 군부는 몇 주안에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고, 독소전쟁이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날 거라고 확신했다.

결국,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자충수였고, 그것에 불을 지핀 히틀러의 선전포고도 헛발질이었다.

독일인들의 승부욕에 불을 지는 루스벨트의 입방정 : 1943년

1943년 1월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만났다. 회담의 목적은 나치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회담이 끝나고 두 정상은 공동 회견을 열어 카사블랑카 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루즈벨트는 뜬금없이 독일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미국의 언론은 그 문구를 부각시키며 '루즈벨트가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다'라는 제목의 헤드라인으로 대서특필했다. 1943년 동부 전선의 전황이 독일에게 불리해졌다. 독일군의 패주가 마지막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고, 독일 국민과 독일군의 사기도 저하되고 있었다. 하지만 루즈벨트의 실언이 독일의 저항을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 독일 국민들에게 무조건적 항복은 완전한 파괴를 의미했다.

만약 루즈벨트가 다짜고짜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괴벨스가 독일 국민들의 저항을 단결시키고 공고하게 만들 빌미를 주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이 좀 더 일찍 끝나면서 수 만명의 목숨이 살고, 나치 독일이 붕괴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던 독일인들의 광적인 저항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호찌민을 지지했었더라면? : 1945년

식민 통치 시절 프랑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베트남을 유린했고, 베트남 국민들을 가난에 빠뜨렸으며 인도차이나 반도를 약탈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패전국이 된 일본은 베트남에서 짐을 쌌고,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던 바오다이(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제13대 황제)는 폐위되었다.

호찌민은 베트남이 독립국으로서 자유를 쟁취할 시간이 무르익었다고 생각했고, 폐위된 황제의 권력 공백을 신속하게 매웠다. 철천지 원수인 프랑스인들에게도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호치민은 착한 공산주의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항거해서 연합군에게 정보를 지원하고, 게릴라 전사들을 선뜻 내주었다. 소비에트연방은 공산주의자라면 일본과 싸우는 미국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소련 멘토들에게 분노를 샀지만 호찌민은 눈도 꿈쩍하지 안았다. 그의 요구는 딱 하나였다. 미국이 1941년 대서양헌장에 기술된 대로 모든 민족에게 보장한 자격권 약속을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도 호찌민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듯 싶었다. 그러나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세상에 착한 공산주의자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목숨바쳐 투쟁으로 되찾은 베트남을 착취자였던 프랑스에게 되돌려 주려고까지 했다.

미국의 실수는 자명했다. 친서방의 착한 공산주의자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호치민을 충직한 동맹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아 버렸다. 결국 미국은 자국 역사장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 하나를 향해 제 발로 들어갔다.

베트남에 평화가 정착되었다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더욱 신속하게 안정화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5만 8,000명의 미국인, 70만 명의 베트남인, 200만명의 캄보디아인들이 킬링필드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다혈질의 자기중심적이었던 맥아더의 한국전쟁 : 1950년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인 중 한사람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 그는"전설","신화"라 불릴 만큼 대단한 인물로 조국인 미국에, 종국에는 전 세계에 대단한 공헌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조선인민국이 기습적으로 남침했다. 맥아더는 전략적으로 가장 빛나는 군사작전을 펼쳤다. 그 작전을 성공시킨 것으로 끝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이후 과유불급의 실수를 저질렀다.

상륙작전은 9월 15일을 시작으로 일사천리로 전개되었고, 채 2주도 지나지 않아 서울을 수복했다. 저 멀리 남쪽의 부산 주변에 머물고 있던 인민군은 보급로가 끊겼고, 대부분 포위되었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측과 유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남한을 탈환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을 점령하고 김일성 정권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애버리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당시 이것이 합리적인 목표처럼 보였다. 유엔 연합군은 전광석화처럼 평양을 함락했고, 가열찬 공세를 이어가면서 동부해안에 위치한 북한의 항구들을 순차적으로 탈취했다. 만약 맥아더가 거기서 멈추었더라면 엄청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넘어 북한을 철저하게 박살냈을 것이다. 당시 중국 국경까지 아직 160킬로미터 남아있었다.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경고하는 소문과 보고서가 이어지는데도 깡그리 무시했다. 결국 11월 25일 중국이 약 30만명의 엄청난 병력을 앞세운 인해전술로 공격했다. 수천 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서울을 포함해 힘겹게 점령한 거점들을 남하나는 중공군에게 넘겨주었다.

노병의 전설적인 군인경력은 1951년 4월 막을 내렸다. 맥아더가 해임된 후에도 한국전쟁은 2년이나 질질 더 이어졌고, 전쟁이 끝났을 때 남한과 북한의 군사 경계선은 북한이 남침했을 때와 거의 똑같은 곳에 만들어졌다.

만약, 맥아더가 1950년 가을에 좀 더 자재력을 발휘했더라면... 통일된 한국은 비록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지 못했더라도 한국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괴롭히는 분단과 상호 불신의 아픈 유산을 물려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했던 역사의 장면들을 읽으면서 느낀점은 우리의 인생도 순간순간 선택과 갈등의 연속이듯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오늘도 흑역사는 데자뷰처럼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본 포스팅은 <다산북스>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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