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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평점 :
일독을 끝냈지만 핵심 키워드인 폭력에 대한 저자의 여러가지 시각의 추상적 표현은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이 이런 모습으로도 해석되고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은 사유가 전제되어야 할 책인 것 같다. 한병철이란 철학가를 만나 폭력에 대한 그의 번민과 단상...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선 이 책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되짚어 보고 전체적인 내용을 잘 요약한 역자 후기의 내용도 소개한다.
서론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폭력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폭력에 대한 혐오가 근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폭력은 그저 변화무쌍할 뿐이다. 사회적 구도가 변화함에 따라 폭력의 양상도 달라진다. p7
폭력은 부정성의 과잉일 뿐만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이기도 하다. 과잉성과, 과잉 생산, 과잉 커뮤니케이션, 과잉 주의, 과잉 행동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 긍정성의 폭력은 어떻게 보면 부정성의 폭력보다 더 치명적일 것이다. p9
제1부 폭력의 거시물리학
1. 폭력의 위상학
전근대 사회에서 폭력은 도처에 존재했고, 무엇보다도 일상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이었다. 폭력은 사회적 실천과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적 요소인 까닭에, 단순히 행사되는데 그치지 않고 의도적으로 공공연히 전시되었다. p15
타자에 의한 외적 강제의 자리에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가 들어선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산의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그때부터 자기 착취가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이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번아웃) 스스로를 착취한다. p20
2. 폭력의 고고학
르네 지라르는 "모방적 경쟁"을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폭력은 인간이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남도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소유의 모방"은 폭력적 갈등을 촉발한다. p22
자본 경제는 피 대신 돈을 흘린다. 피와 돈 사이에는 본질적인 근친 관계가 있다. 자본은 그 형태에 있어 근대화된 *마나라고 부를 만하다. 인간은 돈을 더 많이 가질 수록 더 강해지고, 더 안전해지고, 더 죽음에서 멀어질 거라고 상상한다. 돈Geld은 어원적으로도 이미 희생 및 예배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돈은 본래 희생 제물이 되는 동물을 구하는데 사용된 교환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희생 제물을 가질 수 있다. p34
*마나 - 마르키즈 제도의 원주민들의 비밀스러운 실체로서의 권력을 의미
생존의 히스테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살 줄도 죽을 줄도 모르는 산송장들의 사회이다. 프로이드 역시 이러한 생존의 치명적 변증법을 간파하고,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은 경구로 결론을 대신한다. "삶을 유지하려면 죽음을 준비하라" 그러니까 삶이 죽지 않은 삶으로 굳어 버리지 않게 하려면 삶 속에서 죽음에 더 많은 자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p37
3. 폭력의 심리학
우울은 병적으로 교란된 자기와의 관계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타자와의 관계로 해석한다. 우울병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은 자아 속에 있는 타자를 향한 것이라는 점에서 부정성의 폭력이다. p43
슬픔은 강력한 리비도에 점유된 대상이 상실될 때 발생한다. p55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과 우울증을 단순히 양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울이 비범한 인간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이었다면, 우울증은 비범한 것의 대중화를 통해 나타난 현상이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 권능에 소진된" 인간,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더 이상 없는 인간이다. p56
폭력은 투쟁이나 갈등의 부정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의의 긍정성에서도 폭력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 듯이 보이는 자본의 전체주의는 동의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p60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은 모두 자기공격적 특성을 나타낸다. 자아는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있었던 자리에 스스로 생성시킨 폭력이 들어선다. 이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까닭에 타자의 폭력보다 치명적이다. p62
4. 폭력의 정치
"전쟁, 죽음을 각오한 인간들의 싸움, 적진에 속한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살육, 이 모든 것은 어떤 규범적인 의미도 없고 다만 실존적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이상이나 계획, 규범 속에서의 의미가 아니라, 진짜 적과 전투를 벌이는 실제 상황에서의 의미다" p68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에서 문제는 결정의 투쟁, 단호하게 베어내는 결단의 폭력이다. 결단은 토론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p69
계약 Vertrag은 계약 당사자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합할 것을 전제한다. 그들이 폭력을 포기하고 서로 의논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때 계약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계약은 타협과 마찬가지로 말의 효과다. 게약에는 권력과 폭력의 경제로 환원할 수 없는 의사소통적 중핵이 내재한다. p84
아감벤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미디어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는, 〔…〕 바로 이 미디어가 근대에는 사라진 것으로 보이던 권력의 영광, 즉 박수갈채와 찬미 속에 드러나는 권력의 양상을 관리하고 배분하는 역활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영광 위에 세워져 있다." 즉 "미디어를 통해 증폭되고 확산되는,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갈채의 영향력"이 민주주의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p101
자본의 소비가 거두어가는 갈채의 이름은 소비Konsumption다. p102
5. 폭력의 거시논리
2부 폭력의 미시물리학
1. 시스템의 폭력
폭력의 상황은 시스템적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으며, 따라서 명시적, 표현적 형태의 폭력은 어떤 내포적 구조들,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구조들에서 비롯된다. p121
2. 권력의 미시물리학
3. 긍정성의 폭력
4. 투명성의 폭력
투명성이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타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투명성의 폭력은 궁극적으로 타자를 동일한 것으로 획일화하고 이질성을 제거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투명성은 동일화를 초래한다. 투명성의 정치학은 동일한 것의 독재다. p154
오늘의 투명사회에서 특징적인 것은 포르노적 현시와 파놉티콘적 감시가 서로를 넘나든다는 점이다. p158
5. 미디어는 매스-에이지다.
모든 것이 본래의 규정 이상으로 자라나며 이는 시스템의 비대화와 경색을 초래한다. "너무나 많은 것이 생산되고 축적되어, 결국 그 모든 것이 무언가에 쓰일 시간도 없을 지경이 된다〔…〕. 너무나 많은 뉴스와 신호가 생산되고 전송되어 그것을 읽을 시간이 없다." p172
6. 리좀적 폭력
7. 지구와의 폭력
8. 호모 리베르
폭력의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주인과 노예,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러 완결된다. p198
역자 후기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는 부정성의 폭력을 지나 긍정성의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병철에 따르면 폭력은 형태를 바꾸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폭력은 우리의 삶에 여전히,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는 폭력의 시대적 변천 과정을 위상학적 변화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폭력의 형태를 통해서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한 시대가 어떻게 폭력을 다루는가 그 시대의 성격을 말해준다.
한병철은 폭력이 공적인 장소에서 비-장소Ab-Ort로 옮겨지고 내부화되는 이러한 위상학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인 주권사회와 근대적 규율사회 모두 부정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부정성의 폭력이란 타자에게서 가해져 오는 폭력이다.
한병철이 성과사회라고 부르는 오늘의 사회에 이르러서 폭력은 비로서 긍정성의 폭력으로 전화한다. 긍정성의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폭력,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성과사회의 시스템적 폭력은 성과주체의 무의식적 자기파괴 활동 속에서 관철되어 간다. 우리는 고통없이 다가오는 우리 자신의 폭력을,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을 어떻게 제때 알아차리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pp22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