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을 맺지 못하는 명철함에는 기쁨도 거의 없다. 내가 어쩌면 이런저런 기쁨을 ㅡ 지성의 기쁨이 아닌 ㅡ 느꼈다 해도, 그것을 언제나 다른 여인을 위해 낭비했음을 덧붙인다. 그리하여 운명이 내게 불구가 아닌 채로 100년의 수명을 더 살게한다 해도, 그 삶이 연장되는 데, 하물며 더 오래 연장되는 데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에게는, 그저 삶을 연이어 늘리며 덧붙이는 데 불과했을 것이다. ‘지성의 기쁨‘으로 말하자면, 나의 명철한 눈 또는 나의 이성적 사유가 아무 기쁨도 없이 찾아내고 또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 그런 냉철한 사실의 확인을 과연 지성의 기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따금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를 구원하는 신호가 온다. 모든 문을 두들기지만 그 문은 어느 것에도 이루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았는 단 하나의 문, 100년 동안 헛되이 찾았을지도 모르는 문에 알지도 못한 채 부딪치고, 그리하여 그 문이 열린다. - P28
만일 추억이 망각 때문에 그 자신과 현재 순간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고 어떤 사슬고리도 던지지 못한다 해도, 추억이 그 자리에 그 날짜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깊은골짜기나 산꼭대기에서처럼 고립 상태를 유지한다 해도, 회상은 돌연 새로운 공기를 호흡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예전에 우리가 호흡했던 공기, 시인들이 낙원에 널리 퍼뜨리려고 헛되어 시도했던 것보다 더 순수한 공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그 공기를 호흡한 적이 없다면, 쇄신에 대한 어떤 깊이있는 감각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낙원이란 바로 잃어버린 낙원이기 때문이다. -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