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시대가 가깝고 그 유적이 소상하여, 후인의 모범되기가 가장 좋은 이는 오직 이순신이라. 저술자의 용렬한 필력으로는 이공의 정신을 만분의 일이나 설명한다 하기 어려우나 한 많은 묵은 소설책에 비하면 나은 것이 있을지니, 슬프다, 독서하는 제군이여! 정신을 들여 이순신전을 볼지어다.
임진년 일을 어찌 차마 말할손가. 당파의 의론이 조야에* 치성하며, 상하 물론하고 사사 일에 골몰하여 남을 모함하던지, 남에게 아첨하는 데만 열이난 소인배들이 제 집안네끼리 싸워 날로 서로 살육하매, 어느 겨를에 정치를 의논하며, 어느 겨를에 국세를 염려하며, 어느 겨를에 외교를 강구하며, 어느 겨를에 군비(軍備)를 수습하리요?
정승이니, 판서니, 대장이니, 영장(營將)이니* 하는 이들이 불과 제 집안에 사사로이 싸움한 일로 각기 서로 눈을 흘기며, 미워하고 팔을 뽐내며 호령 하던 시대라. 이러므로 저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란 자가 이름 없는 군사를 한 번 일으켜, 우리나라 지경을 침범하매, 장사(將士)가 흩어지고, 인민이 도망하여, 저희들이 출병한 지 불과 10여 일 간에 문득 경성을 핍박하여, 무인지경 같이 몰아 들어왔으니, 슬프다! 이런 화란(禍亂)이* 난 것을 또 뉘게 원망하리요?
비린 피는 팔도에 가득하고, 악한 기운은 동해에 덮여 7, 8년 동안에 병화가 끊이지 아니하니, 이렇게 부패한 정치와 이렇게 이산된* 인심에 무엇을 의뢰하여, 국기를 회복하였는가? 우리 이순신 공의 공로를 이에 알리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 책보요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전히 모두 동색(冬色)이 창연하군!"
P는 두 사람의 특특한 겨울양복을 보고 그리고 자기의 행색을 내려보며 웃었다.
M이 신을 벗고 들어와 먼지 앉은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춘래불사춘일세."
하고 한마디 왼다. H도 따라 들어와 한편에 앉으며 한마디 한다.
"아직 괜찮아……거리에서 보니까 동복 입은 사람이 많데……"
"괜찮기는 무어 괜찮아…… 우리가 길로 돌아다니니까 사방에서 아이구야! 소리가 들리데."
"왜?"
"봄이 발 밑에서 짓밟히느라고."
"하하하하."
세 사람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동백꽃
김유정 / 책보요여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제 집께를 할금할금 돌아보더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구웠는지 아직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엔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일하기 좋니? 너 봄감자가 맛있단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나는 고개도 돌리려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감자를 도로 어깨너머로 쑥 밀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 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서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우리가 이 동리에 들어온 것은 근 삼 년째 되어 오지만 여태껏 가무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바구니를 다시 집어 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어질 듯 자빠질 듯 논둑으로 힁허케 달아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단편을 맛보다, 하야마 요시키 편
하야마 요시키 지음 | 박소정, 조선혜, 조원로 옮김 / 책보요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둡고, 무덥고, 숨 막히는 선실은 해로운 가스와 악취, 벌레와 세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 있던 환자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취해 있었다.’ 그의 배 속에서는 백 퍼센트 알코올보다도 ‘훅 올라오는’ 콜레라균이 날뛰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기차처럼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침대 위에서, 찬장에 매달려서, 울퉁불퉁한 바닥 위에서, 선실 안에서 몸부림쳤다. 내장에서 쏟아낸 끈적한 오물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처럼 흔적을 남겼다. 그는 증기 기관차처럼 날뛴 끝에 뱃머리의 삼각형 창고로 이어지는 환풍구 위에 다다랐다. 그 뒤 완전히 잠잠해졌다.
그가 조용해진 뒤에도, 어둡고 무덥고 더러운 선실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마구 날뛰고 있었다. 다이산 긴토키마루호라는 탐욕스러운 노파는 부당하게 챙긴 몫을 들고 항해를 이어 갔다. 바다는 파란색 기름처럼 질퍽질퍽했다. 바람은 지옥에서조차 불어오지 않았다. 갑판에서는 선원들이, 기관실에서는 화부들이 저마다 자신을 고문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대문 정거장까지 말씀입니까."하고 김 첨지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우중에 우장도6없이 그 먼 곳을 철벅거리고 가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그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집을 나올 제 아내의 부탁이 마음에 켕기었다.7— 앞집 마나님한테서 부르러 왔을 제 병인은8그 뼈만 남은 얼굴에 유일의 생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폭한 눈에 애걸하는 빛을 띠우며,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라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고 숨을 걸그렁걸그렁 하였다.9
그때에 김 첨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환자는 붙잡을 듯이 팔을 내저으며, "나가지 말라도 그래, 그러면 일찌기 들어와요."하고, 목메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