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본질은 약한 척이다. 약함을 인정하는 일. 당신이 나를 돌본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서약도 포함된다. 귀신에게 내 약한 목덜미를 보여주어 귀신의 공격 의지를 잃게 만들어야 했다. 기도를 하는 중에 대문 쪽을 바라보면 감나무 이파리들도, 시멘트 바닥도, 기어가는 개미 떼도, 내가 신은 어른 슬리퍼도, 귀신을 향해 맞잡은 두 손도, 밤의 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어둠을 지배하는 신을 향한 내 믿음은 오래 이어졌다. 훗날 내 기도가 귀신을 향한 서원(誓願)이었다는 생각을 하면 서늘해졌다. 내 오랜 서원으로, 삶에서 뭔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아서. 죽은 혼에 대고 중얼거린 어린 날의 기나긴 기도, 그 시간이 마당 구석에 켜켜이 쌓여 내 그림자를 이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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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동안 생각했다. 사랑. 미움. 평생. 한순간. 엄마. 아빠. 지겨움. 냄새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 알 수 없을 땐 돌에 기대야 한다. 루비 같은 거. 붉은 돌 같은 거. 부수면 피 흘리는 거.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거. 가질 수 있지만 갖고 싶지 않은 거. 곧 내 인생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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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완벽한 행운
주영하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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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에 자란 30년지기 세 친구가 8백만 분의 1 확률인 로또 40억 당첨된다.

범죄 스릴러 영화는 즐기지 않는데 책에서는 어느 쪽으로 회오리 바람이 몰아칠지 갈길을 종 잡을 수 없는 스릴이 가슴 조마조마 하면서 읽어내려갔다
이 스토리가 영화화 된다면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큰 인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지훈, 명호와는 달리 태헌은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버려졌다. 당연히 친부모가 누군지 몰랐기에 늘 피붙이에 대한 절박함을 안고 살았다. 태헌은 종종 술을 마실 때면 자신이라는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홀로 뚝 떨어진 것같이 느껴진다고 말하고는 했다. 가끔씩 사무치게 외롭다고, 무서울 정도로 혼자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런 태헌에게 아들이라는 존재가 어떤 것일지. 지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절박했을지, 얼마나 간절했을지.
같은 인간이기에, 나약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들이 이해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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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르고 고른 말
홍인혜 지음 / (주)미디어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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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이름을 부쳐 고르고 고른 말들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 신중할까 생각했다
말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듯 완벽한 말의 그림이 그려졌다

나의 말은?
나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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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게 샀다고, 편하게 샀다고 무조건 비용을 아낀 것이 아니다. 묵직한 가책을 느낌으로서 가책 비용을 써버린 것이다. 오늘 나의 편리만큼 지구 저편 누군가가, 혹은 미래의 늙은 내가, 어쩌면 사랑스러운 내 조카나 누군가의 자녀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어떻게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환경의 적은 편리일 때가 많다. 장바구니보다 비닐 봉투가 편리하고, 보리차를 끓여 마시는 것보다 생수 한 병을 사 마시는 것이 편리하고, 양말을 꿰매는 것보다 한 켤레 새로 사는 것이 편리하다. 어지간한 의지나 책임감이 없다면 사람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편리로 기울 수밖에 없고 기업도 그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이런 흐름을 개인의 ‘의식’에만 맡기기에는 부족하니 ‘가책 비용’이라는 값어치적인 개념이 되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당장 세제와 계란이 필요한데 옆 동네 마트까지 걸어가 이것들을 껴안고 손을 호호 불며 돌아오느니 이불 속에서 휴대폰이나 보고 싶다. 몇 만 원만 채우면 무료로 문 앞까지 가져다준다는데 환경을 생각하는 지순한 마음만으로 무거운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 배송품을 받아 들고 쌓인 쓰레기를 보며 느낄 죄책감을 상상하고 가책 비용으로 치환해본다. 내 마음의 평화는 얼마의 가치일까? 조카가 누려야 할 지구를 오늘의 내가 몇 만 원어치 망쳤을까? 이렇게 타산하다 보면 이따금 가책이 묻은 편리보다 다소 번거로운 평화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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