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 불 위에 올려 둔 냄비에 된장을 한 숟가락 풀면서 할머니는 중얼거렸다. 나를 달래려는 말도 아니었고 가르치려는 말도 아니었다. 기도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 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 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그때 나는 싱크대에 기대앉아 마늘을 까면서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 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어떤 말들은 내 몸에 체취처럼 스며들어 지울 수 없는 일부로 남아 버렸다.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라면 나는 지금 병이 든 상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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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맑다.
엄마는 ‘맑다’는 단어를 귀중하게 간직했지. 나는 ‘지금’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지금은 금방 사라지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건 할머니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 사라지는 지금 속에 아직 있다는 것.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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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는 즐거울 때는 같이 웃었지만 슬플 때는 서로 모른 척했다. 위로를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가끔 상처를 받기도 했다. 엄마도 나에게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의 슬픔을 알아차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들키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실컷 울 수 있도록 가게 밖으로 나왔다. 어렸을 때 나는 눈물샘이 자주 막혔다. 슬픈 일이 생기면 그때의 내 사진을 보았다. 눈이 붓고 눈곱이 낀 아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아기. 다시 눈물샘이 막힌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흐르지 않는 아기. 나는 계단에 앉아서 눈을 맞았다. 내 몸을 그대로 통과하는 눈을. 눈이 펑펑 내렸다. 쌓인 눈을 보자 내가 죽은 게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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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는 편합니다. 영화도 혼자 보면 편하고, 여행도 혼자 하면 편하지요.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과거에는 혼자 곧잘 떠나곤 했습니다. 지금도 혼자일 때가 좋습니다.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생각도 정리할 수 있고, 뭔가를 완성할 수 있지요.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늘 혼자일 수 없고, 늘 여럿일 수도 없지요.

-알라딘 eBook <책방 시절> (임후남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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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일은 채우고 비우는 일의 연속이지요. 먹고 배설하는 일이 우리 몸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정신도 그렇지요. 책이야 안 읽어도 그만이지요. 책을 읽는다고 삶이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그런데 그렇게 채우지 않으면 빈 상태라는 것. 제겐 그것이 책이라는 것이지만, 저마다 다른 요소를 갖고 살아가겠지요. 채우고 배설하고, 채우고 배설하면서 자신만의 생활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요.

-알라딘 eBook <책방 시절> (임후남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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