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게 샀다고, 편하게 샀다고 무조건 비용을 아낀 것이 아니다. 묵직한 가책을 느낌으로서 가책 비용을 써버린 것이다. 오늘 나의 편리만큼 지구 저편 누군가가, 혹은 미래의 늙은 내가, 어쩌면 사랑스러운 내 조카나 누군가의 자녀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어떻게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환경의 적은 편리일 때가 많다. 장바구니보다 비닐 봉투가 편리하고, 보리차를 끓여 마시는 것보다 생수 한 병을 사 마시는 것이 편리하고, 양말을 꿰매는 것보다 한 켤레 새로 사는 것이 편리하다. 어지간한 의지나 책임감이 없다면 사람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편리로 기울 수밖에 없고 기업도 그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이런 흐름을 개인의 ‘의식’에만 맡기기에는 부족하니 ‘가책 비용’이라는 값어치적인 개념이 되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당장 세제와 계란이 필요한데 옆 동네 마트까지 걸어가 이것들을 껴안고 손을 호호 불며 돌아오느니 이불 속에서 휴대폰이나 보고 싶다. 몇 만 원만 채우면 무료로 문 앞까지 가져다준다는데 환경을 생각하는 지순한 마음만으로 무거운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 배송품을 받아 들고 쌓인 쓰레기를 보며 느낄 죄책감을 상상하고 가책 비용으로 치환해본다. 내 마음의 평화는 얼마의 가치일까? 조카가 누려야 할 지구를 오늘의 내가 몇 만 원어치 망쳤을까? 이렇게 타산하다 보면 이따금 가책이 묻은 편리보다 다소 번거로운 평화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