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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ㅣ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버틀러를 읽는 어려움
버틀러에 따르면, 육체는 이미 완전히 정치적으로 점유되어 있는 물질성으로서 유효성을 발휘하며 퀴어적인 자기발현의 형태에서 대안적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퀴어적인 동일성은 권력과 담론을 넘어서 있는 주체의 자유나 특정한 성적 동일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부학적인 육체적 성과 성적인 자기동일성 간의 강요된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이성애적 담론체계를 통해 산출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녀는 기존의 성적인 동일성체계를 급진적으로 부정하거나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체계를 가능케 하고 있는 담론들 속으로 들어가 그 담론들 서로를 대면케 함으로써 그러한 이원성체계의 인위성이 드러나도록 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효과들이 재구성되도록 하는 해체구성주의적 전략을 펼치고 있는 것이지요.
우선 carrot님의 질문대로 제목을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한 이유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carrot님도 지적하신대로 번역본 73쪽(원문 32p)에서 버틀러는 동사 matter가 ‘물질화시키다(materialize)’와 ‘의미하다(mean)’을 동시에 뜻하는 말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 둘을 하나로 표현할 말을 생각하다가 ‘의미를 체현하는’이라는 말을 떠올렸다고 기억됩니다. ‘의미를 체현한다’는 말은 ‘의미를 물질화 한다’는 말과 직접 병치될 수는 없지만, 이 때 물질화 개념이 현상학에서도 이야기 되었던 ‘Verkörperung’(가능성 혹은 가능한 능력의 시공간적 한정으로서 육체화)이나 그 이전에 고대철학에서도 ‘가능케 하기’로 이해되었던 ‘potentializing’이라고 한다면(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potence는 가능태를 의미합니다), 의미하다와 물질화시키다라는 말을 하나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 ‘의미를 체현한다’는 말은 ‘의미의 작용능력을 한정짓는다’를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란 의미의 작용능력을 한정짓는 육체에서 한편으로는 체화 내지는 가능케 하기로서의 물질화와 다른 한편으로 의미화가 하나로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둘째, trauma에 대한 논란. carrot님의 지적대로, ‘외상’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저도 들었습니다. 통상 임상심리학에서 정의되는 trauma 개념은 ‘외부로부터 야기되는 정신적 상처’의 의미를 갖기에 ‘외상’으로 번역되는 것 같지만, 이 개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인간의 심리적 소화능력을 넘어서서 극도의 공포나 무기력감을 일으키는 위험한 혹은 위협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건들에 의해 깊은 상처를 받은 상태로 오랫동안 작용하는 특정한 영혼 또는 정신의 상태’를 말합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래서 저는 이 같은 병적 징후를 함의하는 말로 trauma를 번역했던 것 같습니다.
셋째, displace, substitute번역. carrot님의 지적과는 달리 항상 이 두 단어들을 ‘대체’로 번역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번역본 107쪽(원문 50p)에서 “...displaced from her own nature’는 “(그녀 자신의 본질로부터) 추방되어서도...”번역되었듯이, 그때그때의 맥락이 고려되어 번역되도록 하였습니다.
넷째, foreclosure. 이 말은 번역하기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법률적 용어이기도 하고 라캉이 프로이트의 ‘억압(Verdrängung- 이 개념은 의식으로부터 무의식의 상태로 쫓아낸다는 의미를 지니기에 억압의 의미에 앞서 쫓아냄, 밀어냄이라는 뜻을 지닙니다)’개념 대신 ‘거절, 거부, 권리박탈’ 등의 의미를 지니는 ‘Verwerfung’개념을 직접 독일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함의로 ‘폐제’라는 용어가 사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개념은 ‘주체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권리를 박탈당하여 거절된 것이 계속해서 주체를 결정짓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맥락 하에서 사용된다고 여겨집니다.
다섯째, articulate. carrot님께서 제시하신 ‘절합’이라는 말을 저도 들어보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죠. carrot님께서 최근의 논의들까지 검토하실 정도로 많은 공부가 이미 이루어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몇 가지 추기한다면, articulation 개념이 갑자기 구조주의에 오면서 대표개념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에서는 ‘잘 분절된 강연’(스콜라철학), ‘개념의 정교화’(헤겔) 등으로 사용되었고 소쉬르에 이르러 ‘시니피앙의 분절’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음성중심주의의 역사로 보면서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헤겔을 지나 소쉬르에 이르기 까지 소위 형이상학 체계를 해체구성하려는 의도로 이 개념을 부각시킨 이가 데리다입니다. 물론 그것도 1960년대이지요. 그리고 carrot님께서 ‘절합’이라는 말로 대체하시면서 주장하신 내용, 즉 “여러 요소들이 하나로 모여서 기능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며, 단순합산이 아니라, 팔의 여러 뼈들이 관절과 이어져 합체하면서 유기적으로 전체 팔의 모양과 기능을 이루는 것처럼, 요소들의 합체가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기능으로 만들어짐을 뜻하는 것”이라는 내용설명은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 carrot님의 생각과는 달리 articulation이라는 말은 “요소들의 합체가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기능으로 만들어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분절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분절화작용을 통해 정교화됨으로써 본래 그렇게 분절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는 함의를 지닙니다. 즉 시간적으로는 나중이나 전체 체계로 볼 때는 선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요소들의 합체가 새로운 기능과 형태가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능과 형태가 본래적으로 그렇게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정교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에 ‘절합’이라는 말은 그리 타당해보이지 않습니다.
여섯째, sex, sexuality, the feminine, feminity 등의 용어. sex를 항상 성으로 번역한 것은 아닙니다. 생물학적 성이라고도 번역했고, the feminine같은 경우 추상적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을 때 여성성으로 번역한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곱째, recourse. 이 말은 국내 영한사전에는 ‘의지, 의뢰’라고 되어 있지만, 외국어 사전에서는 ‘regress’ 또는 통상의 표현으로 ‘a means of help’의 의미를 지닙니다. ‘되돌아가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지요. ‘억압자의 회귀’라는 말에서 ‘회귀’는 ‘Wiederkehr’이며, 회귀라는 말이 항상 정신분석적 함의만을 지니고 사용되지는 않겠지요.
여덟째, supplement, regulatory ideal. 데리다의 supplement 개념은 ‘부가, 추가, 보충, 대리, 추기’ 등의 함의를 지니는 전략적 개념으로 이에 대한 설명은 그의 ‘Dissemination’에 잘 나와 있습니다. 푸코와 데리다의 개념들을 한 단어로 고착시켜 번역하는 것도 좋지만, 원어를 병기하면서 다른 단어들로 대치시키는 것도 문맥이 허락한다면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고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power is materializing. carrot님의 번역 ‘권력은 물질화시킨다’는 맞습니다. 그러나 ‘물질성을 생산한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서 물질성은 ‘권력의 은폐된 효과’, 다시 말해 버틀러의 지적대로 권력의 작용은 물질적인 효과들을 산출하는 작용이며, ‘물질성은 물질성의 위상이 자취를 감추고, 은폐되며, 가려질 때 현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권력작용의 효과들 내에서 그리고 이러한 효과들을 통해서 성립되는 것이고, 이러한 권력작용의 효과들은 물질적으로 산출된 효과들이기에 ‘power is materializing’의 직역인 ‘권력은 물질화시킨다’외에도 ‘권력은 물질적 효과들의 산출작용에 다름 아닌 권력작용 내에서 성립되며, 따라서 물질화 되는 것이다’라는 번역도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쨌건 권력을 육체에 작용하는 주체나 외적인 관계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권력 투여작용과 물질화를 동시적으로 보고자 하는 푸코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번역하는 것이 어렵기는 합니다.
사실 저는 몇 권의 책을 번역하였지만 번역할 때마다, 문법적 정확성, 맥락에 맞는 번역과 문화적 언어습관의 차이, 꼼꼼한 역주처리, 오역의 가능성 표기 등등의 원칙들이 철두철미하게 지켜져야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적 제약, 열악한 조건 등의 핑계는 최대한 배제하고자 하는 불청객들이지만 항시 문 앞에서 기다리는 피하기 힘든 존재들이기도 하지요.
carrot님께서 제가 ‘뒤를 통해 괴롭힌다’고 하셨는데, 저는 알라딘 담당자분께 감정이 배제된 객관적 비판의 리뷰가 아닌 글에 대해 문의했으며, carrot님의 이메일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두 번 메일을 보냈고 carrot님께서 두 번 답을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화는 알라딘 담당자께서 carrot님께 두 번 하셨을 테지요. 저는 문제를 감정싸움으로 몰고 가려 한 적이 없기에 감정과 관련된 부차적인 것들을 더 이상 확인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비판적 리뷰는 그야말로 'sachlich' 즉 사태 그자체를 다루는 논의로서, 글을 쓴 사람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론적 근거를 염두에 둔 논의이어야 하며, 이는 리뷰어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carrot님을 비롯하여 여러 분들과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