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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찾아왔다. 새삼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가을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의식은 고요에서 고난으로 넘어가던 시기를 기억한다. 마냥 따스하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와, 마천루 숲을 찜통 속 만두마냥 푹푹 쪄대던 열기에 지쳐 영원처럼 느껴질 즈음에 이윽고 찾아온 서늘한 바람이 문득 가을의 입구로 들어섰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바람 역시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모르게 뼛속을 에이는 칼바람으로 변해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다시금 찾은 평안을 느낄 새도 없이 혹독한 고난이 찾아온 것이다. 지금은 딱 그런 시기였다.


“이제야 겨우 조용해 졌네. 시끄럽게 꽥꽥되던 것들이 사라지니 속이 다 시원해.”


남자는 소금을 뿌리듯이 손에 든 막걸리 사발을 흔들며 목 안에서 끓어 오른 가래침을 탁 뱉어냈다. 벤치 끝에 앉아 말을 나누던 소녀는 막걸리 사발에서 자신의 얼굴로 튄 막걸리 방울을 기분 나쁘다는 몸짓으로 닦아냈다.


“겨울이니까요.”


단품의 미색에 홀려 공원을 찾아들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차츰차츰 줄어들었다면 그 변화를 이토록 확실하게 체감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몇 차례 비가 내리고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단풍들이 구겨진 패배자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시기에 맞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단풍을 보기 위해 공원을 찾지 않았다. 이젠 그런 쓰레기와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이. 어쩌면 그런 낙엽더미에서 자신들의 한풀 꺾인 모습을 투영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괴로운 모습을 억지로 보고 기분이 나쁠 필요는 없으니까.


“괴로움으로 가득 찬 세상이에요. 가장 답답한 건 자신이 왜 그런 괴로움을 느끼는지 알지 못하는 것. 이유를 모른다는 것. 그냥 하루하루가 괴로운 거죠.”


“그래서 세상엔 술이 있는 거야.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나 막노동꾼들도 술이 없으면 버티지 못해. 어느 정도는 술로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인 괴로움을 억누르며 몸을 깎아내며 힘든 노동을 해내는 거지. 그리고 더불어 담배는 생명을 갉아대는 대신 평화를 주지. 중독은 생명을 갉아먹지만 그 안에선 평화를 느낄 수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중독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거야.”


“그럼 그만 마셔요. 아저씨는 일도 안 하니까 술을 마실 이유도 없잖아요.”


“시꺼! 난 술에 중독된 거야. 괴로워서 중독된 거라고. 딱 집어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분명 뭔가 견딜 수 없이 괴로우니까 중독된 거라고. 그러니까 참견하지마! 마누라라도 되는 양 옆에서 그만 좀 조잘거리라고. 훠이!”


“아 진짜! 술 좀 튀기지 마요! 옷에 냄새 밴다고요.”


“그럼 꺼지면 되잖아! 왜 굳이 여기에 붙어서 날 괴롭히는 건데? 집에 가라고!”


“싫어요. 여긴 원래 내 자리라고요. 나중에 온 건 아저씨니까 법적으로 따져도 나한테 우선권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떠나요.”


“헹! 내가 왜? 이렇게 조용하고 좋은 곳을. 물도 나오지 쉴 수 있는 의자도 있지. 애초에 공원은 시민 모두의 거라고.”


“먼저 꺼지라고 한 건 아저씨잖아요. 이 술주정뱅이야.”


“고딩이면 고딩답게 일찍 일찍 집에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이 싸가지 없는 계집애야.”


“저 대학생이거든요? 성인이라고요. 밤늦도록 뭘 하든 내 맘이에요.”


벤치 양 끝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도사리고서 소녀와 남자는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서로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그런 대치는 몇 분이고 계속 되었다. 마치 짐승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짐승과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눈싸움을 하듯이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만두자. 꼬맹이랑 무슨 감정싸움을 한다고... 그래 좋아. 있어도 좋다고. 대신 입 좀 다물어. 시끄러워서 막걸리가 어떤 맛인지도 모르겠다.”


“막걸리가 다 똑같지 무슨 맛이 있다고 그래요?”


“있지 왜 없어? 암! 있고말고. 너도 나처럼 많이 마시다 보면 알게 돼. 가만히 맛을 음미하다 보면 효모의 숙성 깊이를 느낄 수도 있지. 그러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자고 우리.”


“좋아요. 나도 더 이상 아저씨랑 말 섞기 싫으니까.”


소녀, 효인은 목 주변으로 흘러내린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며 공원의 낮이 고요히 일몰에 잠기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 탓에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땅거미가 찾아 들었다. 차가운 바람은 더욱 거세져 갔고 바람의 황량한 외침이 공원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는 소리도 더욱 커져 갔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벤치의 두 남녀는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어둠 속에 눈이 익어 어느 정도 실루엣은 인식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눈이 고양이의 그것과는 같을 수는 없기에, 결국 옆에 앉은 사람이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증명 받을 길은 목소리 정도 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 이런 시간에 나 같은 남자랑 있으면 겁나지 않냐?”


은근한 목소리. 말하는 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그런 자신의 목소리에 그녀가 진짜로 겁내는 걸 두려워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효인은 그만 풋 하고 웃어 버렸다.


“날 무시하는 거냐?”

“아뇨. 오히려 지금의 말에서 더욱 안심이 들어서요. 확신이라고 할지,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네요. 생긴 것과 달리.”


“당연하지. 난 이래봬도 신사라고. 여자에겐 절대로 손 안대. 아무리 열 받게 굴어도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남자에겐 그런 것이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이리라. 자신보다 약한 이를 괴롭히지 않는다. 불의를 못 본 체 하지 않는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다 등등. 어찌 보면 바보스러우리만치 한심한 것들이지만 가끔 여자들은 도리어 그런 남자의 순수함에 끌리곤 하는 게 아닐까? 자신에겐 없는 단순함에 말이다.


“그거 잘됐네요. 앞으로도 아저씨랑 싸울 일 많을 것 같은데.”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발에 마지막 한 방울의 막걸리까지 탁탁 털어내 우악스럽게 들이킨 그는 크게 트림을 하고는 그대로 엉덩이를 미끄러뜨려 등받이 난간 위에 목을 걸치고 누웠다. 그의 눈은 먼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의식 역시 어두운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듯했다. 멍하게 비어가던 남자의 눈동자는 곧 무거운 눈꺼풀 속에 잠겨 들었다.


“의기(意氣)란 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솟아나지만 그 무엇보다 위대하지.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건 그 의기야.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한 때의 영광만을 되새기며 살아가게 되지만 가끔 그 중엔 의기를 일으키는 자가 있지. 그럼 그 자는 마법처럼 전성기 때의 능력을 발휘하는 거야.”


술주정인지 충고인지, 의미 모를 소리를 내뱉은 남자는 잠이 들었는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자는 시늉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크게 코를 고는 그를 효인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벤치 위로 무릎을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


“나한테 그렇게 구슬픈 목소리로 한탄을 해봤자 소용없다구요.”


바람이 일었다. 한 모금의 체온마저 앗아갈 듯이 차갑고 메마른 바람이 낙엽을 머금고서 둘의 주위를 맴돌았다. 남자의 손에서 떨어뜨려진 술병과 사발을 깨지지 않게 벤치 아래 한쪽 구석에 치워 놓은 효인은 펄럭거리는 신문 뭉치를 날아가지 않게 누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자의 발치엔 벤치에서 노숙을 할 요량으로 가져온 듯한 신문 뭉치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위에 날아가지 말라고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누름돌로 올려놓았는데 그게 밤이 되자 그의 예상보다 바람이 거세져 그만 신문 뭉치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신문들이 비둘기마냥 비상하려던 그때, 막걸리 병과 사발을 치우던 효인이 쥐를 사냥하는 고양이처럼 타이밍 좋게 그것을 내리 누른 것이다.


“이거 설마 화장실에서 밑 닦으려고 가져 온 건 아니겠지?”


효인은 우글거리는 신문의 윗 장을 보며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이 공원의 화장실엔 싸구려 펄프 휴지가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굳이 휴지가 있음에도 신문을 쓰진 않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좀 더 자세히 구겨진 부분을 살펴보았다.

낡고 헤져 있었지만 바람에 모서리가 뒤집힌 맨 윗 장의 날짜를 보니 바로 어제 나온 것이었다. 아마도 반복해서 펼치고 접고를 반복하여 이렇게 누더기가 되었으리라. 그 증거로 자세히 보니 윗 장 아래의 신문은 그나마 애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난히 우글거리는 부분, 손가락으로 헤집은 것처럼 누덕 진 신문 귀퉁이의 기사를 읽어 내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나 볼 법한 실종 사건. 요즘 시대엔 이 정도 나이 대의 실종은 희귀한 일도 아니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부근의 여자아이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기사는 매번 자고 일어나면 뉴스에서 들을 수 있었다. 가출을 했던지 유괴를 당했던지, 이도 저도 아니면 남 몰래 자살을 했던지... 원인을 추측해 보면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아니, 오히려 요즘은 트랜드의 이동이라고 할까, 이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나이 대 아이들의 실종보다 유치부에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자주 각종 매스컴의 화제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엔 무심코 넘어가는 부분이라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사건이나 사고 역시 유행처럼 돌고 도는 경향이 있었다.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사건이 어느 날 아무렇지 않은 일상처럼 들려오곤 했다.

이건 어쩌면 매스컴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어떤 일을 은폐하거나, 혹은 서로 커다란 이슈를 공유하자는 모종의 계약을 맺고 약속을 한 것처럼 일시에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기사를 연이어 터뜨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 개인의 사정에 의해 뭔가를 은폐해야 할 필요가 있거나 어쩌면 요즘 한창 떠돌고 있는 음모론 같은 국가 차원의 협박이 있었다거나.....


“또 경계를 넘었네.”


본래의 목적에서 몇 단계를 뛰어넘은 자신의 망상 세계를 추스르며 효인은 신문지 뭉치를 벤치 위, 남자 곁에 놓아두고 주변에서 큼지막한 돌멩이를 주워와 날아가지 않게 고정시켰다.


“죽지 말아요. 다음에 봐요.”


남자가 깨지 않도록 작게 속삭인 그녀는 몸을 돌려 벤치에서 멀어져 갔다.





누구든지 가끔씩은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 스스로의 책임으로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타인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다가 그것을 배신당하여 생겨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미 벌어진 일. 그런 인연 자체를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허둥대지만, 사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어차피 모든 건 마음에 달린 것. 상황을 받아들이는 아량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부분에서 효인에게 닥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제법 거물급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고양이를 한번 들어 올려 얼굴을 살펴보고는 여행용 우리에 집어넣고서 함께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듯이 집을 나섰을 뿐.


효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후 그녀의 여정은 가볍게 집을 나선 모습만큼 녹록치는 않았다. 버스를 타는 데에 몇 십 분을 소요하고 전철을 두 번 갈아 탄 후에야 효인은 자신이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했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그녀는 지하철 입구 근처에 위치한 허름한 빌딩으로 들어서며 우리를 든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얼굴엔 한가득 비장한 그림자를 드리워졌다.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잘못된 물건을 항의하러 온 손님을 대하듯이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곁에는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20대 초중반 즈음 되어 보이는 나이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 그녀의 두 손엔 와인 병이 들려 있었고 뚜껑은 열어놓은 채였다.


“사실은 이럴 때가 가장 난감하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반응이 그 반대라면 말이야.”



형광등 불빛으로 구석구석 환하게 밝혀진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말끔한 검은 여성 정장 차림의 그녀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서 차가운 얼굴로 효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선 마치 문상객을 맞이하는 상주 같은 엄숙함이 느껴져 효인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어디 보자.....”



소년은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나 효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곤 곧바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여행용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효인은 몸을 틀어 들고 있던 우리를 허리 뒤로 숨겼다.


“무슨 짓이야?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상태를 봐야 제대로 확인을 할 거 아닌가. 고양이를 보여주지도 않고 나보고 네가 말하는 ‘원래의 상태’로 돌려 달라고 하는 거야? 난 마술사가 아니라고.”


“...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효인은 마지못해 손을 앞으로 가져와 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우리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고양이를 꺼냈다. 주인의 손에서 조금의 앙탈도 없이 순순히 우리에서 빠져나오는 하얀 고양이. 하리는 긴 털을 가지고 있어 흡사 솜뭉치처럼 보이는,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와 늘씬한 몸매가 아름다운 터키시 앙고라 종(種)이었다. 녀석은 집과는 다른 분위기의 환경에 처했음에도 여타의 고양이처럼 반항을 하거나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인의 품에 안긴 녀석은 그 말끔한 푸른 구안(球眼)으로 효인과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고는 이내 고개를 모로 돌려 어딘가를 응시했다. 하리의 시선을 따라 효인이 고개를 돌리자 사무실 구석에 길고 검은-아마도 옻칠을 한 듯한- 나무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것을 집어넣는 용도라고 하기엔 크기가 너무 큰 그 상자는 일단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인간도 들어갈 정도의 너비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엔 도리어 관 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한 눈에 보기에도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상자인건 분명했다.


“하얀 앙카라로군. 자신에게 생명을 준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어. 고양이치고는 예의가 바른 녀석이야.”


소년은 조심스럽게 하리의 머리를 쓸어주고는 몸을 돌려 원래의 자리, 상석의 푹신한 소파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옆의 소파를 가리키며,


“좀 앉지 그래. 보는 사람이 정신 사나우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은 네 고양이를 고쳐줄 수 없어.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나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어야 하거든. 조금만 기다리면 일어날 테니까 그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라고. 목마르면 음료수라도 한 잔 줄까?”


도저히 어린아이의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의젓한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소년의 태도에 효인은 가슴 속에 묵직한 분노가 솟아났지만 어쨌든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그였기에 얌전히 권하는 대로 소파에 가 앉았다. 소년이 한 번 더 음료수를 마시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그리곤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뒤편에 놓여있는 예의 검은 상자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자고 있어. 밤과 낮을 바꿔 사는 녀석이라서 말이야. 잠을 자는 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지만 평범하게 낮에 움직이고 밤에 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수면 시간을 이해하기 어렵지. 어쨌든 맘 편히 있으라고. 과자 줄까?”


아이다운 치근이라고 해야 할까? 소년은 연신 지존부리를 권하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효인은 자신의 고양이를 이렇게 만든 부분에서 그 역시 한몫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쉬이 마음을 놓지 않았다. 자신을 경계하며 계속 권유를 거부하자 소년은 이내 포기해 버렸다.


“당(糖)은 여러모로 좋은 작용을 하지. 적정량 이상을 섭취하면 독이지만 적절하게만 섭취하면 머리를 쓰는 데도 우울한 기분을 푸는 데도 좋아.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도 만들지.”


원래의 성격 탓인지 나잇대 다운 속 좁은 마음 덕인지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효인은 검은 상자를 다시금 바라보며 물었다. 그 다른 한 명이 저 안에 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저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건 세속의 관념 상 맞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애묘를 변모시킨 주범 중 하나가 소년이라고 확신한 심증으로 다시금 저 안에 분명 사람이 들어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금방 뚜껑 열고 나오겠지. 지금 즈음이면 많이 배고플 테니까.”


“뭐?”


뚜껑을 열고 나온다는 소리를 듣자 효인은 소년을 돌아보며 억센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와 동시였다. 등 뒤에서 나무문이 열리는 듯 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 것은.


“일어났네.”



소년은 다시금 채워진 와인 잔을 기울여 붉은 알코올을 한 모금 마시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시끄러워서 깼나? 일어나기엔 아직 좀 이른 시각 같은데.”


“응? 아니. 자기 전에 알람을 맞춰 놓았거든.”


“알람?”


“실험 같은 거라고 할까 훈련이라고 할까. 내 스스로 생각해도 난 잠이 좀 깊은 편이거든. 필요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버릇을 들여놔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알람을 맞춰 놓으면 소리가 울린 후 얼마 만에 일어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지.”



남자일까 여자일까? 효인은 딱 꼬집어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그(혹은 그녀)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일단 머리는 단발. 게다가 차림도 남자 정장이었다. 같은 정장 차림이라도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와는 분명 구분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고운 목소리와 얼굴 생김, 호리호리한 몸매가 확실히 남자라고 단정 짓기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새치처럼 머리카락 밑 부분이 하얗게 염색되어 있는 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여성적인 취향? 남자다운 노련함? 어쨌든 그런 헤어 스타일이 세련되고 깔끔해 보이는 그(그녀)의 이미지에 플러스 요소가 되는 건 확실했다.


“근데 이 분은?”


“응. 자기 고양이 원래대로 해놓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찾아왔대.”


“아, 그 service? 그거 마음에 안 든대? 내 나름대로 엄청 smart한 녀석으로 골라서 한 건데 말이야.”

 

“일반인 눈에는 어떤 녀석을 깃들게 하던 괴물로 보이는 거겠지. 내가 봐도 제법 예의 바르고 이성적이고 얌전한 녀석인데 말이야. 안타깝군.”


소년의 말에 또 다른 소년(혹은 소녀)은 입술을 비죽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효인을 돌아보았다. 초록색 눈동자에 윤기가 흐르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 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를 한 이국의 소년은 인형 같은 얼굴로 효인에게로 다가왔다. 효인은 어리다곤 하지만 자신과 거의 맞먹는 키를 가진 이국인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내심 섬뜩할 만큼의 긴장감을 느꼈다.


“내 말투가 이상하진 않죠? 알아듣겠죠? 그럼 실례되는 일이겠지만 데가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만, 정말 저희들이 service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까? bonus? 어쨌든 당신의 고양이를 바꾼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죠? 확실히 그 뜻이 맞죠?”


효인은 영어 울렁증은 아니었지만 이국인 특유의 따지는 듯 한 당돌함에 기가 죽었다고 할까. 그의 질문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 그것이 불만이고 그 원인을 캐묻고 따져 자신의 고양이를 원래대로 고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만, 그걸 위해 어떤 것이든 불사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전투 모드로 마음을 다잡고 찾아온 거지만 도저히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선뜻 대답하는 것이 두려웠다.


“모습이 변한 것도 아니고 당신이나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은 원래 당신의 고양이가 확실해요. 다만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이성을 지니게 되고, 약간의 힘을 준 것 뿐. 그 힘은 분명 자신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신중하게 쓰여 질 겁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 힘으로 당신을 공격하지는 못해요. 그렇게 제한을 걸어두었으니까요. 신중에 신중을 기해 가장 얌전하고 이성적이고 제법 pride? level 높은 녀석으로 신중하게 골라서 깃들인 건데 그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니 많이 안타깝군요.”


문장의 중간에 들어가곤 하는 매끄러운 원어 발음을 들을 때마다 효인은 등골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여튼 그걸 감안하고라도 분명 한국어가 확실하고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발음과 억양이 엉망인 것도 아님에도 효인은 대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왠지 이국 소년의 면상에 주먹을 한 방 날려주고 싶은 용기라고 할지, 마음마저 들기 시작했다. 나무 상자에서 흡혈귀 마냥 튀어나온 수상하고 꺼림칙한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자신이 하리를 사랑하는 만큼 지금의 상황을 장난처럼 대하는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는 거겠지. 효인은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해석했다.


“멜바튼 그만해. 어쨌든 사장이 알기 전에 이 일을 해결해야 해. 그녀 귀에 들어가면 골치 아파져. 원만하게 해결하자고. 조금 있으면 노하가 찾아올 거라고. 시간이 없어. 그래서 되돌릴 순 있는 거야?”


“없어. impossibility.



그렇게 대답하는 얼굴이 무척이나 여유롭게 보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이 아닌, 방관자의 입장에서 즐거운 장난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듯 한 악동의 얼굴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엉망으로 만들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이다. 아까워. 이성의 실이 끊기기 직전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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