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귀야행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홍영의 옮김 / 초록배매직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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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딱히 유령이라고 할만한 심령적인 존재들이 나오지는 않는다. 각 단편들의 등장인물들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공포, 강박 속에서 미쳐가고 때로는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단순히 환각이나 환상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환상 속에서 끔찍할 정도로 육감적인 질감을 더해가던 공포의 대상들은,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뒤섞여 서로 영향을 미치며 더 이상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백귀야행>의 귀신들은 사람들의 머릿 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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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피색 가게들 - 슬라브 문학 2
브루노 슐츠 지음, 정보라 옮김 / 길(도서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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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는 그냥 왠지 <계피색 가게들>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게되었다. 읽다가 진절머리 나게 느낀 것이 있었다. 묘사가 정말 장황하다. 길고 자세하다. 꼼꼼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묘사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정말 적확하다는 것이다. 한줄 한줄 읽어 나가기가 오리걸음처럼 힘들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정확하고 불가피하며 아름답다. 그 문장들은 계피색이며 계피향이 난다. 이 인상적인 묘사의 풍경들 틈에서 인물들은 인상파 회화처럼 움직인다. 이 끈질긴 묘사를 붙잡고 우리말로 옮겨낸 번역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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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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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성석제씨의 장편소설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단편집 한 권을 접한 다음 성석제씨의 단편집은 거의 다 읽게 되었다. 우선 짧고 재미가 있었으니까. 그 재미는 달콤한 과자를 먹는 것과 비슷했다. 더 먹고 싶기는 한데 괜히 욕심 내서 많이 먹으면 물려서 안 먹은 만 못하게 기분 찜찜해지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인간의 힘>을 읽었고 그 걱정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면에 침잠하는 소설도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그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이야기는 그 안에 들어가서 나오기 전까지 현실의 나는 죽어버리는 그런 것이다. 성석제씨는 역시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단, 액자 소설의 마무리는 약간 진부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내용도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야기의 시각은 균형이 잡혀있다.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칭송, 자화자찬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큰 미덕이다. 사대주의, 꽉 틀어막힌 가치관에 대한 은근한 조롱은 이 소설을 끌어가는 큰 힘 중 하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잘라 말하자면 비루하다. 서슬이 퍼런 높으신 양반들도 시종 후줄근한 우리의 채동구 선생과 결국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자기 자랑은 끝간 데가 없는 주제에 소심해서 이익 앞에서는 비굴하고 맞으면 아프고 안 씻으면 땟국물이 흐른다. 성석제씨의 소설에서 나오는 웃음은 냉소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웃음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끝에서 우리의 채동구 선생이 완성한 것은, 분명 갖은 한계로 둘러쳐지고 답답하기 그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인간이다.

그 인간은, 마지막까지도 구차하지만, 몸으로 배우고 울고 느껴서 스스로 당당할 수 있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석제식의 의뭉스러운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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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샨티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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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길에서 주운 이야기>라는 책으로 이현주 목사님을 알게 되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래저래 기독교 특유의 넘치는 확신과 그에 비례하는 편협함에 지쳐있던 터라 (물론 굉장히 좋은 신부님들도 몇 분 알고 있지만, 별로 안 좋은 평신도들이 주위에 너무 많았다.) 더 신선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대표적인 불교 경전인 <금강경>을 쉽게 풀이하고 있다. 그 시선은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히 목사님의 그것이다. 곳곳에서 불경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마치 불경과 성경이 애초에 하나의 경전이었던 것 같다. 부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말이 쉽고 편안해서 이해하기 좋은 것도 이현주님의 특징이자 이 책의 장점이다. 처음 불교를 접하는 사람의 인문용으로도 좋을 듯하다. 기독교도도 이해할 수 있는 불교라고나 할까. 예수님과 부처님이 그렇게도 애써서 가르치신 사랑과 자비가 이 세상에 더 널리 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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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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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묘한 시점을 통해서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라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보여준다.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과 그들의 후손의 이야기가 거침없이 이어지지만, 그 속에서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도 작가가 충격을 받을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유머란 무엇일까라는 새삼스러운 의문을 품게 되었다. 분명히 우스운 내용인데, 나는 별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웃기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닌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기회에 나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내 집착을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시니컬함 뒤에, 작가는 정말로 인간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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