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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인간의 힘>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성석제씨의 장편소설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단편집 한 권을 접한 다음 성석제씨의 단편집은 거의 다 읽게 되었다. 우선 짧고 재미가 있었으니까. 그 재미는 달콤한 과자를 먹는 것과 비슷했다. 더 먹고 싶기는 한데 괜히 욕심 내서 많이 먹으면 물려서 안 먹은 만 못하게 기분 찜찜해지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인간의 힘>을 읽었고 그 걱정은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면에 침잠하는 소설도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그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이야기는 그 안에 들어가서 나오기 전까지 현실의 나는 죽어버리는 그런 것이다. 성석제씨는 역시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단, 액자 소설의 마무리는 약간 진부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내용도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야기의 시각은 균형이 잡혀있다.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칭송, 자화자찬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큰 미덕이다. 사대주의, 꽉 틀어막힌 가치관에 대한 은근한 조롱은 이 소설을 끌어가는 큰 힘 중 하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잘라 말하자면 비루하다. 서슬이 퍼런 높으신 양반들도 시종 후줄근한 우리의 채동구 선생과 결국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자기 자랑은 끝간 데가 없는 주제에 소심해서 이익 앞에서는 비굴하고 맞으면 아프고 안 씻으면 땟국물이 흐른다. 성석제씨의 소설에서 나오는 웃음은 냉소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웃음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끝에서 우리의 채동구 선생이 완성한 것은, 분명 갖은 한계로 둘러쳐지고 답답하기 그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인간이다.
그 인간은, 마지막까지도 구차하지만, 몸으로 배우고 울고 느껴서 스스로 당당할 수 있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석제식의 의뭉스러운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