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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일기
최민석 지음 / 해냄 / 2025년 1월
평점 :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 글은 저녁을 먹고 마감 세일상품을 건질 요량으로 하나로마트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와 건식족욕기에 발을 담그고 앉아 쓰고 있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님에 대한 오마주이다.
('마드리드 일기'의 시작이 항상 이런 식이다. 예를 들면 "이 글은 숙소 창문에서 갑자기 떨어진 블라인드를 손봐주겠다고 하고, 오지 않는 직원을 기다리다 지친 채 쓰고 있다."와 같은 식)
<마드리드 일기>는 소설가 최민석이 (외국에서는 영어 표기 때문에 민숙 초이라
불린다) 2022년 교환작가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마드리드에 머물면서 쓴 75일간의 기록이다.
저자는 타국에서의 경험은 제때 쓰지 않으면 기억이 남지 않기 때문에 매일 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아니
대체 뭔 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쓰나. (무미건조한 팩트로 채워진 내 일기장에게 미안해진다)
# 작가가 경험한 모든 것은 유머로 승화된다
처음에 마덕리(마드리드)에 도착하여 중고 자전거를
사며 겪은 웃픈 에피소드부터 어학원 친구들과의 만남과 이별, 코로나에 걸려 고생한 이야기, 이민 1세대 원로 한국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등 작가가 맛깔나게
적은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는데 정말이지 이 책을 손에 들고 있던 3일 저녁 내내 실제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이 책은 지하철 등 대중교통 이용시 읽으면 안 된다. 우울할
때 방구석에서 읽는 거 추천!)
예를 들어 "나는 한인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라는
문장을 최민석 작가가 쓰면 이렇게 된다.
"수업 준비와
집필보다 검색에 더 열과 성을 쏟은 결과, 마덕리에 사는 한인 미용사를 찾아냈다 (...) 유럽에서는 자칫하면 미용실로 들어갈 때는
사람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올 때는 울상 짓는 송이버섯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솜씨 좋은 한인 미용사는 '최민석씨! 이대로 인간의 삶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라고 결의한 응급전문의처럼, 인간으로서의 내 생명을 연장해 주었다."(303~304쪽)
#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도 담겨 있다
유머만 있는 건 아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도 있고, 감동도
있다.
작가는 소설가가 서반아어 공부를 해서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는 이내
이렇게 답한다.
"그건, 돌이켜 보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건 언제나 금전적 보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순수한
즐거움만 바라며 삶에 무용한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삶은 언젠가 보상을 전해준다"(180쪽)

# 작가, 즉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도 잊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가의 삶은 마냥 쓰는 삶은 아니라고, 쓰는 삶은 공부하는 삶이라고 한다. 평생 쓸 사람이라면, 평생 공부할 수밖에 없다고.
이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명작들을 살펴보다 글쓰기에 대한 통찰로 옮겨간다.
"글은 한 인간의 나태해진 영혼에 거센 충돌을 일으켜, 그 영혼이
기민하게 살아 움직이게끔 해야 한다. 프라도의 많은 명화들이 일견 충격을 선사해 관람객의 동면 중인
영혼을 뒤흔들어 깨우듯 말이다."(311쪽)
#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좋다
영국에 사는 팔촌 형네 집에 간 작가는 샤워를 하기 위해 온 몸에 비누칠을 한 그 시점에서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는 시트콤과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알 수 없는 응급 상황이 발생해 수도 회사 직원들이 공사를 하기 위해 수도를 잠가버렸다는 것.
팔촌 형이 마트에서 사온 1.5리터 생수병 두 개로 몸을 씻었으나 '도브'의 강력한 비눗기가 사라지지 않아 '인간 도브'가 되어버린 작가님 ㅠㅠ
이 사건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형수는 영국에 삼십 년 넘게 살면서 "샤워를 하는 도중에
단수를 경험하는 건 민석 씨가 처음이에요"라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여행을 다닐 때마다 가방에 여권을 챙기면 늘 불운도 함께 따라왔으니 말이다.
지난 보며 늘 이런 일이 생기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만약 우주 어딘가에 이야기를 관장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늘 내게 과할 만큼
이야기 꾸러미를 선물해 주니까. 그리고 역시 어디에나 환대해
주는 존재들이 있으니까(....) 어쩌면 나는 낯선 도시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런 존재들을 만나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통해 여러 가지 난관을 겪으면서도 이러한 상황에 감사하는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가 좋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도 좋다.
# 최민석 작가는…
2010년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창비 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을
시작했다(제목만 봐도 독특하고 웃길 것같다 --;;;)
장편소설 <능력자><풍의 역사>ㅡ 소설집<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에세이 <베를린 일기><40일간의
남미 일주><기차와 생맥주><고민과
소설가> 등을 썼고, 제36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 감상평
당분간 여행(특히 해외)을 가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이런 저런 여행기를 읽으며 랜선여행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마드리드가 아니라 작가님께 감겨버렸다.
두세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아 벌써 작가님에 대한 흥미가 솟아나기 시작했고 (소설가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정보 없이읽기
시작했고, 죄송하게도 작가님의 소설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틀째 일기를 다 읽고 나서는 반드시 앞으로 작가님 소설과 에세이 모두 도장깨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한지 저자가 2016년에 출판한 <베를린 일기>를 통해 입덕한 독자들이 상당히 되는 듯하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솔직하고 웃픈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심지어 낯설고 신기한
이국이 그 배경이고 그 속에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감동이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마드리드 일기로 돌아와서...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이국의 풍경들과 맛있는 음식들도 실려 있어 랜선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나처럼 당분간 랜선 여행에 만족해야 하시는 분들, 아니면 야심차게 여행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분들, 때로는 사는 게 재미 없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분들 아니면 사는 게 재미있지만 더 재미있게 살고
싶으신 모든 분들께 이 특별한 여행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