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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테임드 - 나는 길들지 않겠다 ㅣ 뒤란에서 에세이 읽기 2
글레넌 도일 지음, 이진경 옮김 / 뒤란 / 2021년 4월
평점 :
저자가 면밀하게 분석한 사회 구조의 기만적인 성차별과 구속, 스스로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 여성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 어떤 근현대 철학의 명저도 능가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저자 글레넌은 열 살 때, '소녀의 덕목'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폭식과 폭음으로 회피합니다. 하지만 16년이라는 오랜 암흑기를 거치고, 알콜중독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각성과 재탄생의 고통과 기쁨을 온몸으로 끌어안게 됩니다.
글레넌이 금주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첫 아이의 임신이었어요. 결국 결혼과 세 번의 출산, 양육의 삶이 이어집니다. 아이가 셋이라는 이야기가 초반에 등장했기 때문에, 아주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한국과는 비슷하면서도 좀더 지독한 맥락에서 '슈퍼맘 컴플렉스'가 성행하고 있는 미국에서, 엘리트 엄마들이 상상이상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미드의 주요 클리셰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 대한 그 모든 '뿌리 깊은' 억압들이 글레넌 자신을 망칠 뻔 했지만, 결국 그녀가 각성하게 된 계기도 되었습니다. 미국 엄마들 클리셰를 볼때마다 드는 생각은, 일종의 '정신적인 덫'에 걸려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글레넌은 그 덫을 파괴하려고 하는 사람인 것이죠. 혼자가 아니라, 세상 모든 여성과 함께.
자신을 중독에서 꺼낸, 자녀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 정신력으로, 글레넌은 본인의 자아 또한 쉴새없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내 자녀들은 케이지에 갇힌 삶을 살게 할 수 없다는 의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녀를 위해서도 엄마인 자신이 자아에 충실한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좋은 엄마에 집착하기보다는 좋은 사람이 좋은 엄마이자, 좋은 친구일 수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자아 성찰을 투철하게 하고 있는 사상가이자 동기부여가가 된 것이죠. 2부에서는 탈출 프로토콜이 등장합니다.
글레넌을 읽는 동안, 저의 해묵은 고통과 원죄!! 그리고 한계없음이라는 스스로와의 약속, 매일 마주치는 자아와의 고통스러운 조우를 겪어내야만 했어요. 2부를 읽던 시점에서는 그녀의 뼈때리는 충고에 카타르시스를 느껴서 밤낮없이 무언가를 계속 하게 됐었는데요. 예민하고 불안정한 자아에 충실하기로 한, 저자의 민낯이 상당부분 드러나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합니다.
<느끼다>의 high상태를 계속 기대한다면, 이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 우울해질 수도 있어요. 우와! 너무 좋았어! 내 속이 다 시원해! 라는 기분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죠. 일단 이 책을 다 읽어보긴 해야겠는데, 모든 글이 같은 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당황했고, 그동안 책의 일부로 작가를 평가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들었어요.
그러나 글레넌이 대단한 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2부 만큼은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작품들이었어요. 끊임없이 고통받고 형성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공유하고 싶구요. 이 책에는 그녀의 연설가다운 모습과 아주 사적인 고충이 함께 담겨있어서, 한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할 때 감당해야 하는 희노애락을 책 한권에 겪을 수 있습니다.
혁명가에게 상상력이 왜 중요한지를, 가장 논리적이면서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글레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특히나 가방 끈 길고 엉덩이가 무거운 남자가 했다면! 남이 쓴 글을 짜집기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시대별 번역 차이도 있었겠지만요.
글래넌의 글은 권위적인 텍스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마력이 있었습니다. 규율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자신의 내면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 같은 글을 썼죠.
<언테임드>에는 명언과 인용문이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짧고 굵은 한마디를 빌어와 충격요법으로 동기부여를 합니다.
"꿈꾼다는 것은 계획 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글로리아 스테이넘도,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어요. 몽상가인 동시에 계획주의자인 저에게 힘을 팍팍 실어주는 명언과 함께.
글레넌은 꿈꾸고 상상하고 계획하라고 합니다. 그녀가 탁상공론자가 아니란 것은 3부에 등장하는 다양한 투쟁과 일상에 대한 성찰에서도 충분히 드러나있습니다.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투게더 라이징>의 활동은 과도기에 시작했음에도 그녀의 진정성과 행동력에 감탄하고 존경할 수 밖에 없네요.
행동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 담긴 그 모든 에너지가 기존의 책들과 다른 결이었을까요?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 술을 끊고 육아를 한 지 18년 만에, 그녀는 결혼의 위기에서 일생의 사랑을 만나, 자신의 종교생활 마저도 위기에 빠뜨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동안 자아와의 화해를 위한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여전히 삶은 고통스럽고 자신은 케이지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죠.
아마도 또한번 인생을 리셋해야하는 시점에서 언테임드라는 제목이 탄생한 것 같네요. 글레넌의 새로운 가족을 중심으로 그녀의 삶이 그녀의 본질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비록 사랑이 서투르고 타인의 자유에 불편함을 느낄지라도 말입니다. 그녀는 계속 불태우고 다시 태어날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셰계적으로 엄격한 외모 기준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의 입장에서, 그녀의 바비인형 신드롬은 뜻밖이기도 하지만 아주 익숙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재미로 흘려봤던 2000년대 하이틴 로맨스 중에는 배경이 미국인데도 '또래문화'가 지배적이고 '외모'는 우열을 가르는 가장 원초적이고 결정적인 기준인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바비인형과 자신을 비교해야 하는 걸까요? 왜 한국사람들은 '살쪘네', '살빠졌네'를 안부인사랍시고 건네는 걸까요? 각자의 외모를 더 만족스럽게 꾸미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바비인형을 지향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의 '개인의 취향'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나요?
요즘 다시 화두가 되고있는 한국의 '장녀 컴플렉스'와 맞물리는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언테임드>는 글레넌 자신의 이야기이자, 세상 모든 여성과 마이너리티의 이야기이자, 글레넌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사람으로 지목당하는 저와 같은 사람도, 종종 타인의 기대에 스스로의 기대까지 더하고 역할 갈등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여성이 권력은 바라지도 않고 내조만 하기를 바라거나,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인자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에서도 여성들 자신이 외모나 성격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서열화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해묵은 논의지만, 저와 이 논점을 공유했던 최소한의 공동체가 해소된 이후로 저 또한 이 사회에 길들여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여성에게 '되어야 하는, 보여야 하는' 형용사가 아닌 '움직이다, 실천하다'의 동사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물건을 구매하거나, 집안을 장식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성에게 허용된 범주의 동사가 아닌 것을 해보자고 할 생각입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들이, 악처와 헤픈 여자라는 오명을 썼습니다. 권력을 추구했던 여성들이, 폭정으로 평가되기보다는 남편의 명예실추로 욕을 먹었습니다. 독신으로 예술이라는 불멸의 인생을 창조한 여성들이 그래봐야 노처녀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여성들이 불명예의 두려움과 싸우기를 바랍니다. 제 입으로 '강해지기 바란다'고 말했다가 여성들에게 거부당한 적도 있습니다. 강한 여성들은 길을 열어주거나 위로를 하고 때로는 대신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강한 여성의 존재가 박탈감을 주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80-90년대생을 밀레니얼, 또는 '캣니스 에버딘'세대라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약자를 위해 싸우다가 밈(meme)이 되어버린 여전사를 보고 사랑에 빠진 이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캣니스 에버딘이 활약한 <헝거게임> 시리즈가 흥행을 하지 못했지만, 저는 <반도>의 이정현 배우와 <승리호>의 김태리 배우에게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강해질 수 없다, 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분명, 캐릭터가 대표하는 여전사에게도 사연이 있습니다. <킹덤; 아신전>에서 전지현 배우가 극도의 수모를 겪고 흑화하는 것을 보고 대리만족을 하는 사람이 있고 대신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강한 여성들은 타고나야 하는 걸까요?
전쟁이 사라져도 군대는 사라지지 않기에, 남성들이 겪어야 하는 맨박스는 여성들의 케이지만큼 굳건합니다. 권력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적 속성을 '여성스러운'이라 부르고 비인간적 남성을 진정한 인간상으로 제시하며 여성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혐오하게 합니다. 여성은, 너무 여성스러워도 욕먹고 너무 여성스럽지 않아도 욕먹습니다.
소위 '여성스러운' 남성은 자신을 발현할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여성들은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사회의 검열을 겪어야 하는 반면, 남성들은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었던 유년기를 거쳐 위계서열이 엄격한 군대생활, 이미 군필자가 주도하는 사회생활을 합니다. 강약약강의 법칙을 체득한 남성이라면 손 닿는 곳에 있는 여성과 약자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남성이라면 어느시점에 부러지거나 여느 여성과 마찬가지로 속이 곪아 있을 것입니다.
글레넌은 인종차별에 반대한답시고 '온건한' 반인종차별 투쟁만을 멀리서 지지하는 것은 사실상 묵인에 가까운 비열함이라는 고발도 해버립니다. 그녀의 적극성이 백인여성으로는 부적절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유색인 여성의 입장에서 글레넌의 뒤늦은 깨달음에 안도를 하는 한편, 안도해야 하는 입장인 것은 분명 화가 나는 사실입니다. 왜 모욕감은 나의 몫?
아마도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한 어떤 남성이 갑자기 여성운동까지 주도하려 들 때의 아찔함이 느껴졌다고 해야할까요? 글레넌은 끊임없이 각성하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백인이라는 특권'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자, 그녀 자신이 더욱 각성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한국 여성들과 나누고 싶은 쟁점 중에서, 특히 저는 같은 아시안끼리의 인종차별(인근 외국인 혐오), 성소수자 차별이 가장 민감하고 시급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계인의 관점에서 한국인에게 바라고 싶은 부분이라면, 미국 등의 서구권에서 흑인들의 아시안 차별에 관한 것인데요.
흑인들이 (백인이 아닌) 아시안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당연히 인종차별이지만, 그것은 인종간의 혐오를 조장한 사회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아시안의 폐쇄적 연대를 추구하기보다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열린 토론과 전략적 연대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를 잘하시는 분들은 이미 하고 계시겠지만, 저도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기를 더욱 섬세하게 해서 더 많은 동지들과 소통하고 싶네요.
겉으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국 사회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그들이, 왜 목사들의 저주에 작아지고 독실한 부모와 갈등을 하고, 왜 한번뿐인 인생에서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낳고, 왜 입양보낸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등에 대한 무수한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글레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성차별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종교인의 어리둥절함에는 차고 넘치게 응답을 해주었죠. 그녀 자신이 신앙을 버리기 보다는 '믿음'의 가치를 유지하되 '신'의 존재와 대리인의 존재를 분리함으로써 진정한 종교인으로 거듭나는과정이 있었는데요. 이미 종교인 중에서는 가장 설득력있는 접근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복음주의 폭로를 속시원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간섭이, 사랑이 아니라고, 그녀는 정정합니다. 여성을, 성소수자를, 약자를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만큼, 상처가 되는 행위는 바로,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우리의 영혼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 비뚤어진 사랑과 선을 그어야한다면 긋겠어요. 사랑은 교정이 아닙니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장유유서와 같은 뿌리깊은 교리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모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예쁘고 똘똘한 어린이, 젊은이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성장한 이들도 있겠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동의없이 가르치려하고 공손함을 요구하고 같은 보수에 업무가 추가된 적이 있지 않나요? 우리 때 그랬으니까, 라는 말이 지금 통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20대와 40대가 불화를 겪고 있지 않나요?
사람들은 아픔에 공감할 줄 알고, 불의에 저항할 줄 압니다. 눈 앞에 어린아이가 불타고 있는데 자신이 화상을 입을까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다시금 인간성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착하기만 한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착한 사람이 이용당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이고, 첫번째 문제는 착한 사람 본인이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진 세계를 더 기울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봉사, 라는 단어에 자선을 베푸는 듯한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동등한 입장에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설명에 동의했습니다. 그 후로는 봉사, 라는 단어를 가급적 쓰지 않게 되었구요. 도움이 필요한 약자, 위기에 처한 여성에게 당장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누구나 항상 최전방에 있을 수는 없지만, 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힘이 되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저 또한 제가 목격했거나 요청을 받은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등한 입장에서 공유해야 하는 자매애나 인류애여야 합니다. 권력을 대신하여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권력을 되찾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언테임드>의 3부는 케이지를 탈출한 글레넌이 세상의 부조리와 정면대응을 하는 한편, 자신의 내면과 무의식을 돌아보고 불태우고 재건하는 과정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글은 너무도 속시원하게 조목조목 해결해주는데, 어떤 글은 내내 답답하다가 겨우 결론에서 숨통만 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추리고 재구성하는 동안 계속해서 내면과 무의식을 불태우고 재건해야 했습니다. 흥미진진함도 있었고, 답답하지만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요. 어쨌든 읽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책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사적이기도 하지만 여지껏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은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입니다.
<언테임드> 원서의 부제는 "stop pleasing, start living"입니다. 글레넌은 강한 여자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낱낱히 고발합니다. 자기안의 여성혐오와 자기혐오를 정면돌파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삶이란, 타인의 삶을 보살피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소유, 라는 것만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년병을 자랑스러운 국가의 아들, 이라고 이름붙여 총알받이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랑스러운 국가의 어머니, 라고 이름붙여 총알받이가 될 아들을 낳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충성과 가족애를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국가주의는 다만 희생을 요구할 뿐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글레넌의 두번째 결혼생활과 <언테임드>에 포함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녀의 고단했던 젊은 시절은 계속 충격적인 반전을 거듭합니다. 사랑이 처음이라, 신혼의 불꽃이 가라앉고 단단해지는 과정이 두렵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정해진 시간 외의 휴식은 꼴보기 싫다거나, 자신이 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취미생활에 박탈감을 느낀다거나.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알게됩니다. 나도, 하면 될 것을. 그래서 그녀는 도전합니다. 이 뒤늦은 깨달음과 재빠른 도전에 알 수 없는 전율이 느껴집니다. 오랜기간 케이지에 갇힌 자아를 술로 마비시키고, 육아와 선행으로 자신을 그저 채찍질하며 살아온 여자가 마흔이 넘어서야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취미생활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합니다.
글레넌이 덕질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덕질이라면 그럭저럭 남부럽지 않게 해봤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사람으로 소문났지만, 여전히 저는 어떤 재능에 에너지를 투자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능이 조금이나마 있는 것을 덕질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 재빠르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만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