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
듀나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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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막연한 현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단 한 번도 그런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조금만 지나도 그 '현재'는 지금과 다른 구체적인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전 그 시대가 정확히 언제였고 그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구체적인 과거를 사는 사람들은 완벽하게 비정치적일 수 없습니다.
-241p, 작가의 말

*

인간인가 아닌가. 생명을 가진 존재와 지능을 가진 존재의 가치가 다르다면 왜, 어떻게 다른가. 진짜 나는 무엇인가. (진심이 담긴 혐오와 친절한 거리두기 중 무엇이 더 모욕적인가.) 인간은 같은 종의 다른 모습을 왜 견디지 못하는가. (말살하려 하는가!)

​시간 여행이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는 걸 어느 시점에 깨달았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댈러스행 국제선 비행기(최초의 장거리 비행)에서 보다 잠들었는데도 이해가 됐던(?) 무자막 <인터스텔라>였나? 아니면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읽는 동안이었나? 무엇이든, 잠들어 있던 시간여행(을 상상해보는 설계자)의 욕구를 깨우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22세기 말이 배경인 나의 디스토피아(혹은 유스토피아)는 여러 이유로 아직 잠들어있다. 그중 하나는 재생산에 집착(?)하는 나의 욕망을 좀더 냉정하게 관찰하고 싶은 마음, 또 하나는 과거를 거울삼아 다양한 시간대를 자유자재로 이동하고 싶음이다. 토하지 않을 속도로 역사와 동시대에 관한 문헌(그래봐야 대중교양서와 인터넷 검색일지라도)을 검토하면서 이 분야에 특화된 작가들-허버트 조지 웰스, 황모과, 한강-을 탐독하고 있다.

퍼플레인의 4, 5, 6, 7권(모두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이다.)을 읽는 내내 3권이 듀나 작가의 책이란 걸 알면서, 부끄럽게도 이제야 8권을 통해 듀나 작가에게 입문했다. 듀나 작가의 시간여행은 (그래봐야 조금 영리한) 독자로서는 예상치 못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40년 또는 2년 또는 찰나가 역사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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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중요했지. 인간인가 아닌가. 하지만 대화가 가능한 온갖 지적 존재들이 만들어지면서 우린 그 구분을 포기해버렸어. 우주선이건, 스테이션이건, 안드로이드건, 산업 로봇이건, 개량된 다른 동물이건, 우린 모두 시민이야. -20p, 그깟 공놀이


하지만 진짜가 그렇게 좋니? 너도 네 진짜 모습을 다 보여주고 싶지 않을 거고, 다들 그럴 거야. 넌 이런 게 가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피부처럼 자연스러운 우리 일부야. 진짜 자신을 보여준다는 건 내장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너도 슬슬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좋은 너를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거야. -91p, 항상성


아발론 요새 사람들은 무색인들을 혐오했다. 그들의 지능을 의심했고 그들을 둘러싼 폭력적인 소문을 두려워했다. 색소가 결핍된 외모 역시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기를, 그게 어렵다면 될 수 있는 한 아발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기를 바랐다. 첫 번째 바람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피임 기구의 제공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무색인 여자들이 그 혜택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발론의 문명인들이 이들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이 산아제한이라면 이는 그냥 인종차별적이었다. -121p, 아발론


너희들은 그렇지 않아도 무한하게 갈라질 시간선에 하나를 더 추가할 뿐이야. 그리고 네가 아무리 그 시간선의 며칠 앞으로 가서 같은 장난을 쳐도 그 시간선의 마산과 부산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살릴 수 없어. 그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죽은 채로 남아 있어. 그리고 네가 조작해 새로 만든 시간선이 그 뒤로도 제대로 흐를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178p, 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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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그리운, 혹은
고통스럽기 직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런 생각을 종종 해보지만 부질없다. 근미래의 기술이(설령 상상일 뿐이라도) 과거의 나로 돌아가게 한들 2025년 현재의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메타인지적) 자아가 과거로 이동한다면 여기 남겨진 나는 더 고통받겠지.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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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벤 앰브리지 지음, 이지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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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른다. 물론 여정은 놀랍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으로 가득할 것이다. 만약 사건들이 지나치게 예측 가능한 경우(영웅이 집으로 향하는 직항 비행기에 탄다) 혹은 지나치게 예측 불가능할 경우(영웅이 개구리로 변해 지구 밖으로 뛰어 내린다) 만족할 만한 이야기라 할 수 없다. -17p, 이 이야기가 당신의 인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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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가 있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너무도 만연해서 읽은 듯한 <오디세이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실버 블레이즈>, 지극히 사실적인 동시에 연극적인 <기생충>, 전세계에 걸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는 <신데렐라>의 다양한 버전과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미운오리새끼>, 한 시대를 형성하다시피 했던 <헝거게임> 등 흥행에 성공한 이야기에는 뭐가 있다?!

<이야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에 등장하는 여덟가지 마스터플롯은 물론 처음 등장하는 마스터플롯들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 벤 앰브리지 교수는 마스터플롯의 흥미요소를 찾는데 그치지 않는다. 각각의 마스터플롯이 ‘현실’에서 바이럴된 경우와 그 원인에 대한 과학적인 해부로 나아가며 악용된 사례까지 분석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상하는 마스터플롯을 조장하고 기만하는 악당을 지목한다. 그래야 플롯에 낚이지 않고 플롯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의 위기에서 멸망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가려면 어떤 마스터플롯을 따라야 할까? 궁극적으로는 지구를 구해야겠지만, 각자의 일상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마스터플롯은 무엇일까? 픽션을 위한 스토리 창고 이상의 무언가를 건네받은 듯하다.


*

속임수가 핵심이다. 위대한 코미디나 미스터리 작가는 결과를 완벽하게 위장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예측을 위한 씨를 심고 키운다. 경찰은 마권업자를 체포했다……그는 마구간을 기웃거렸고……동기도 명백했다.
-85p,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싶다면 언탱글드 마스터플롯


슬픈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은 연민뿐만 아니라 판타지 항목에서도 높은 점수를 보였다. 이들은 소설이나 영화의 서사에 푹 빠지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음악과 이야기는 비슷할 것이다. 비극적인 이카로스 마스터플롯을 즐기는 사람은 (슬픈 음악처럼 모든 사람이 즐기는 건 아니지만) 주인공을 향한 연민의 감정을 즐긴다.
-127p,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카로스 마스터플롯


우리는 공정한 세상을 왜 믿는 걸까? 이에 반하는 증거가 매일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러너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는 건 그러한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 우리의 노력이 직업적이든, 사회적이든, 사랑이든 성과를 내리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사실이 아닐 경우,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라면 굳이 왜 그런 노력을 기울이겠는가?
-283p, 모두의 응원과 사랑을 받고 싶다면 약자 마스터플롯


우리 모두 자신이 태어난 순간 '다른 사람들'(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구멍을 파기 시작했으며 그때 이후로 구멍이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356p, 밑바닥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구멍 마스터플롯


나는 이 책이 세상을 구하기를 바란다. 전 세계 리더들(정치인, CEO, 인플루언서 등 기후 변화와 관련해 조치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마스터플롯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력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마스터플롯을 현실적인 사건에 부여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깨달아 그들이 마침내 행동을 취하기를 바란다. -388p,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성공한 이야기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희망이 생기는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시절에나 좋은 날과 슬픈 날이 있었겠지만 우리는 말 그대로 ‘타들어가고’ 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마스터플롯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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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하이스트리트 - 명동, 홍대, 강남, 성수, 한남, 도산 대한민국 6대 상권의 비밀
김성순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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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관념에서만 존재하고, 하이스트리트의 아홉 가지 속성 중 일부는 상충하는 힘에 가깝다. 상충하는 힘의 공존은 거친 봉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그대로 두는 데서 실현된다. -11p, 들어가는 말

사람을 모으고, 브랜드를 살리고,
도시를 바꾸는 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뒤표지

***

산책덕후도 산책덕후 나름이겠지만 산책본능을 명동에서 발견한 한국언니라면 얘기가 다르다. 메가 하이스트리트인 홍대와 강남이 본격적으로 흥행하던 2000년대에 20대를 보낸 한국언니는 여행도 산책하기 좋은 곳만 골라서 했다.

도쿄 하라주쿠나 맨해튼 5th 애비뉴는 물론 그보다 먼저 방문한 오모테산도(당시에는 청담인 줄)와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좀 여기가 제대로 성수 느낌)까지, 해외의 하이스트리트를 다녀와서도 팬데믹 이후로 국내 핫플을 재발견하는 재미에 정신을 못차리고 다음 여행비용을 미리 탕진하고 있다. 어쩌면 서울이 가진 잠재력이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지도.

​이 책은 ‘상권’을 다루는 동안 적어도 서울, 도쿄, 뉴욕에는 있을법한 글로벌 브랜드와 명동, 홍대, 강남, 성수, 한남, 도산이라는 친숙하고도 브랜딩된 장소에 집중하기에 경영이나 부동산과 심적 거리가 있더라도 산책하듯이 즐기면서 방구석 시장조사를 할 수 있다. (문학덕후에게 특히 추천!) 해외를 포함해 현장에 방문한 적이 많을수록 이해가 빠를 것이다.


[목차 X 챕터요약 X 책속에서]

밸류애드: 가치를 더하다

1946년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최초로 만든 파리 몽테뉴가 30번지의 디올 하우스를 재현한 디올 성수의 건축물은 SNS 업로드용 사진의 필수 스폿이 되었다. -53p

앵커: 시선강탈을 하는 스폿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고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공장소나 유휴 공간도 종종 앵커가 된다. 코엑스와 수원 스타필드의 별마당 도서관은 상업 기능이 배제된 서비스 공간인데,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그들의 시간을 점유하는 특별한 장소로 자리하고 있다. -85p

파사드: 랜드마크의 필수조건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Sphere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돔형 엔터테인먼트 공연장이다. 높이 112미터, 지름 157미터에 달하는 대형 공연장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너끈히 들어간다고 한다. 지구를 축소하거나 지구본을 확대해 놓은 모양의 이 공연장은 지구인 1만 8,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125p

팬데믹: 선견지명과 불확실성의 파티

명품 브랜드들은 백화점이 정한 조건을 따를 수 밖에 없었고, 백화점의 보이지 않는 참견으로 청담동이라는 한국의 특수 상권을 제외하고 플래그십을 내는 게 어려웠다. 이런 연유에 반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청담동을 ‘명품의 유배지‘라 부르기도 했다. -140p

레이어: 성장과정이 빚은 시그니처

명동은 특유의 회복탄력성으로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팬데믹 등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변화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남았다. 명동이 서울의 심장부로서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지켜보는 것은 도시 경제와 리테일 트렌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171p

등용문: 브랜드와 상권의 역학

요즘 ’힙‘한 브랜드는 백화점이라는 전통적 상업 시설에 입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MZ세대, 알파세대에게 백화점은 더는 선망의 쇼핑 공간이 아니다. -202p

K: 이제 세포라도 안 부럽지 모야

글로컬은 글로벌global과 로컬local의 합성어로, 국제적 시각과 지역적 특성을 결합한 개념이다. 세계적 트렌드와 기준을 지역 특성에 맞게 적용하고, 지역의 강점을 세계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차기 네오 하이스트리트로 떠오르는 북촌과 을지로 일대는 그 지역만의 정통성과 토속성이 시장 가치를 인정받아 이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개성을 가진 관광지로 널리 알려졌다. -215p

연결: 핫플에 끌리는 마음

소비자들이 자기 아이덴티티와 공명하는 공간을 찾아가는 시대에, 네오 하이스트리트는 방문 자체가 자기표현의 일부가 되는 효용을 준다. 동시에 도시 공간의 파편화와 계층적 분리라는 사회적 문제를 초래한다. -246p

(디자인하우스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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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한 사람들 - 다정함을 넘어 책임지는 존재로
김지수 지음 / 양양하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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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하고 밟고 올라서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한층 더 삭막해진 시점에 진짜 어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해주는 좋은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고 포근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자께서 인터뷰한 여러 분야의 의젓한 사람들을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어서 더욱 매력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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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릇 내가 좋아하는 것들 17
길정현 지음 / 스토리닷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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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 된다. 그 균열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중략) 상처 났던 바둑판은 제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대로 유착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 비자의 생명은 유연성이란 특질에 있다. 한 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힘으로 도로 유착, 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란 특질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이를 테면 졸업 증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감이 될 뻔했던 것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되레 한 급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특급품(김소운)

​*

​그릇덕후의 그릇에세이, 취향을 담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시리즈는 아무래도 덕후들과 연결되어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소설과 산책은 이미 선점한 저자가 있다.) 그릇을 통한 은유를 그릇덕후인 길정현 작가가 언급했듯이 나 역시 은유덕후(?)라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그럴 그릇이 못 돼.’와 같은 그릇드립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가하면 프롤로그에서 자동소환되는 김소운(나 아님주의)의 대표작 ‘특급품’은 주로 수능 레퍼런스에 박제되어 있는 작품이지만 전문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작년에 김소운 수필집을 구입했으나 그 책에는 실리지 않아서 다시 검색을 했다.) 나는 바둑판에 비유한 인생 이야기인 것까지만 알고 있었지, 그 인생 이야기가 누구의 인생인지는 여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내 이름이 더 좋아졌다. 이 작품의 전문은 찾기 쉬우니 물어보지 말고 검색하자.

그릇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릇이 깨질 가능성을 떠안고 살아갈 다짐을 포함한다. 마치 책을 좋아하는 마음은 책이 젖을 가능성과 패키지 딜인 것과 같아서 찌릿하고 짜릿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을 줄여가며 버티던 시간을 보상하듯 평균 하루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정작 읽을 시간이 없던 책을 수집했던 지난 봄이 다시 한 번 책탑의 형상으로 떠오른다.

그릇까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럭저럭 모아두었던 무민컵과 다양한 톤의 회색 접시까지 엄마에게 맡겨두고 심플한 화이트 기본식기만 사용중이다. 하지만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본문에 언급된 그릇을 핀터레스트에서 검색했다. (사진을 넘겨보자) 처음 들어본 브랜드가 압도적인 와중에 글만 읽고도 맞추었던(?) 포트메리온 보타닉가든과 로열 앨버트 레이디 칼라일은 언젠가 소설 속에 등장시켜보겠다고 다짐하며.

*

본래 수집이라는 것은 그런 효용성을 따지는 일이 될 수가 없다. 예뻐서 모으고 귀여워서 모은다. 그것을 소유하고 내 눈앞에 가까이 두고 내가 원할 때 만져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67p, 그 물건의 쓸모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인 창작의 세계에는 고양이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세계에서는 그 어떤 동물도, 하다 못해 강아지도 열세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 특유의 감성 같은 것이 창작의 어딘가에 닿아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 역시도 고양이를 좋아한다.
-116p, 세상살이의 스펙타클함과 어려움

세상의 많은 부분은 은근 슬쩍 이어져 있어 뭔가에 관심을 두고 좋아하다 보면 어 느덧 그 관심의 범위가 야금야금 넓어진다. 그러다 보면 이날은 이것에 기대어 살고, 다른 날은 저것을 덕질하며 버틸 수 있게 되면서 내 하루하루가 그럭저럭 괜찮아진 다. 좋아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175p, 좋아하는 것이 많다는 것

*

책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자동으로 떠오른 나의 그릇들이 있었다. 그건 내가 이고지고 살아온 세월동안 내내 어디엔가 소품으로 등장시키려고 벼르고 있던, 절친 유진(가명)이 준 두 개의 작은 반찬접시와 그보다 훨씬 자주 사용하는 다른 두 개의 중간 사이즈 원형접시였다. 각각 새것은 아니었고 선물한 이의 원가족이 쓰던 물건으로 보이는데 내 손에 들어온지 만 22년이 됐지만 여전히 접시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일부는 굽이 더러워졌고 일부는 나의 무심함 탓에 냉동실에 얼려진 동안 유약이 훼손되어 오염에 취약하지만 바짝 말린 상태로 마른 안주 같은 것을 담기에는 손색이 없다. 그런, 그릇 에피소드를 품고 있었다는 걸 볼때마다 깨달아야 하는 책이라 놓칠 수 없었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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