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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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표지와 마찬가지로, 아니 에르노의 목소리는 비수가 되어 심장에 날아든다. 어딘가에 얼어붙기 전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기회가 되어 초판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왜, 어떻게 얼어붙었을지, 짐작이 가면서도 막상 손대기가 두려웠던 책. 우리가 기다려온 소녀의, 소녀들의 진짜 자서전.

화자와 거의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내가, 내 또래의 가상 인물이자, 내 또래의 거의 모든 여성의 초상인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최근까지도 어리둥절했던 심리의 이면에는, 그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면역력이 없고 상처받기 쉬운 여자가 있다. 결국 화자는 그 현실에서 산 채로 죽어갔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갔어야 할 길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했다. 이 책은 그 치열한 여정의 살아 숨쉬는 기록이자, 증거이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수기에 가까운 사실주의 소설임을 감안해,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라고 봐도 무방한 화자의 십대와 ‘최근에 얼어붙은’ 김지영들의 십대는 한 세대 이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차에서 뚜렷한 변화를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21세기가 되고, 호주제와 낙태죄가 폐지되고 일부 지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지영이나 내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90년대 이후에 당한 수모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얼어붙은 여자>의 화자와 같은 늦둥이 외동딸은 우리 시대에 더 많았겠지만, 그렇게 면역력이 없는 소녀들이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결혼제도 속에서 어떻게 산 채로 죽어갔을지는 상상할 자신도 없다. 상상하고 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있다니, 이미 그 삶에 갇혀버린 이들에게는 죄송한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 죄책감이 부당하다. 얼어붙은 엄마들의 삶에 무한한 유감을 가지는 것은 맞다. 어떻게 해서든 하루빨리 엄마를 은퇴시켜보려고 일찌감치 출가해서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데도, 때로는 기혼 여성들이 더 심하게 경멸하는 혼자의 삶을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여성을 말함에 있어서, 결혼 유무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도 말도 안되게 부조리하다. 내가, 다른 독자들과 썸을 탈 것도 아닌데, 내가, 결혼은 하지 않았소! 라고 말을 해야 결혼한척 한게 아니게 될 것이니. 게다가, 이 고백으로 기혼 여성들에게 역시, 넌 몰라! 라는 말을 듣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 몫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도 그 분들에게는 신선놀음이겠지만.

그녀보다 40년 뒤에 태어나서 그나마 다행인 것 한가지는, 이제 우리가 더이상 남자들을 위해 치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그렇다. 이제 공작새의 미인대회 같은 것에 가장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여성들이, 건강을 위해, 자기 만족을 위해 몸을 만드는 시대다. 하지만 남성들의 입맛에 맞는 포즈와 앵글이 독립적인 여성 피사체의 자기표현과 겹친다. 새로운 여성상, 더 강한 여성상을 제시하고 싶은데, 이런 시류의 흐름이 걱정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있는 매력과 애교마저도 숨기고 싶을 정도이다. 불특정 다수, 보다 정확히는 잠재적 동료인 동시대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자칫하면 남자들의 인기에 취한 모습과 헷갈릴까봐 두려울 때가 있다. 20년 전에도 그랬던가? 그때는 자기 표현을 하는 대담한 여성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관종이 독립된 범주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의심없이 받아들인 이성애적 환상과 그에 따라오는 불길한 운명, 저주받은 미래. 단지 사랑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오래 머무르게 하려고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하다가, 결국 망해버린다. 내가 영원히 할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역할놀이를 아무 보상없이 얼마나 하겠는가? 한 계절, 길어야 두 계절이다. 독립적인 남자를 찾아내는 취향과 눈썰미가 없다고 자책해봐야, 그 또한 내 몫이 아니다. 애초에 여성들의 몫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도 의아한 것은 여전히 아들이 개구쟁이어도 아들이니까, 라고 말하는 엄마들이다. 결국 엄마의 책임인건가. 왜 아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나. 그들이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할 무렵, 그 엄마의 일손을 덜어주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아내이다. 이건 말대로 악순환이다. 나는 이 게임을 할 수가 없다.

독립적인 여성들, 비혼 여성들에게도 당연히 딜레마가 있다. 그보다도, 비혼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 나이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나이먹는 속도에 비해서, 노처녀의 커트라인이 높아지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화살같은 세월 속에서도 자리 보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싸우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십년 째 아무도 노처녀라고 부르지 않아서 오히려 김빠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른다. 시대가 바뀌기는 했다. 지금은 선택받아 결혼한 여자들이, 여전히 스스로 선택하는 대신, 결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얼어붙지도 않은, 비혼의 삶을 부러워한다. 여전히 일부는 비혼 여성을 비웃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위로하지만 적어도 몇몇은 솔직하다. 토끼같은 자식을 키우고 있는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자유롭고 싶다고. 엄마 이전에, 사람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 욕망이 이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으면 좋겠다. 죄책감은 당신의 몫이아니니까. 그럼에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겠지.

아니 에르노의 시대는 가전제품 회사들과 가족임금을 추구하는 회사들의 교묘한 결탁으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셀프감금을 하면서 그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던 시대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의 저임금 노동, 돌봄 노동, 돌봄의 의무가 없어도 업무 외의 돌봄이 강요되는 사회생활, 자아실현을 위해서 또는 집사람(housewife)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생계가 위태로우면 임금노동과 무임금 가사노동을 병행하는 것이, 이 사회가 ‘엄마’라는 이름에게 강요하는 의무이다. 슈퍼우먼이 많아질수록 현실의 여성들은 말라죽는다. 더구나 돌봄의 유료화가 미천한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슈퍼우먼조차 그녀들의 엄마, 친정모에게 의존한다. 이게 말이 됨?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더 불행한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폭력이다. 왜 여성은 기구해야 하나? 아니 에르노가 80년 전에 태어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계속 소환하는 김지영은 고작 한국나이로 40세일 뿐이다. 지금 잘나가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알파걸의 시각에서는 기구하기엔 너무나도 젊다. 그보다는 젊다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과정을 세밀하게 꺼내놓은 작업은 말 그대로 눈이 부시다. 아직 나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사실적인 언어가 더 많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 에르노를 포함해서, 뼈 때리는 언어로 유명한 여성 작가들을 부지런히 더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진솔하게, 내장까지 꺼내보일 자신은 없지만, 이런 작가들의 언어를 통해서 내면을 정리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픽션의 속시원한 복수는 없지만, 팩트의 속시원한 해장이 기다리는 책, <얼어붙은 여자>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 지원받아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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