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의 7년만에 출간된 신작입니다. 전작 ‘64’를 워낙 인상깊게 읽기도 했고, 최근 다른 작품을 읽으면서 빈틈없이 펼쳐지는 문장의 향연이랄까 빈틈없이 꽉 짜여진 이 작가의 문장이 그리웠습니다. 어느 순간 읽는 사람이 넋을 놓을 정도로 몰아치는 그 박진감은 덤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범죄’ 혹은 ‘사건’이 중심에 놓인 스릴러를 생각하고 책을 펼쳤는데,
주인공의 직업부터 이미 예상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건축사, <200선>, Y주택, 건축사무소, 이혼한 전처, 두 사람의 딸 그리고 기념관 공모 등등. 그저 무작정 ‘책’으로 뛰어든 저는 조금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져버렸습니다.
건축잡지에서도 칭찬일색이고, 사진을 보고 반한 의뢰인들이 찾아가보기까지 한, 뭔가 주인공 아오세 미노루의 인생작품이 된 이 저택을 의뢰한 일가족이 실종됐습니다.
이쯤에서 또 어떤 ‘사건’이 터지길 기대했지만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아오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를 수렁에서 나오도록 손을 내민 현재 사무소의 소장, 대학 동기 오카지마, 의뢰를 해 놓고 집이 완성됐는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요시노 도타, 세계적인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실존 인물), 알려지지 않았던 화가 하루미야 하루코, 타우트의 디자인을 따라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던 요시노 이사쿠의 이야기가 처음엔 전혀 접점이 없는 여러 가지 일들 처럼 여러 곳에서 시작됩니다. 마치 점이었던 것들이 중반 이후로 선처럼 연결되며 그저 전문용어 같았던 ‘노스라이트’가 작품 전체에 흩뿌려지는 것 같습니다.

작품 초반 주인공의 모습은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Y주택이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시점부터 점점 변화를 겪는 그의 모습은 때로는 안타깝고, 때로는 답답합니다.
단지 이 인물 단독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찾는 것, 그의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과 그가 보낸 시간들에 대한 복기, 녹녹치 않은 현실의 무게는 꽤 무겁습니다. 중반 이후로는 오소소하게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빨리 읽히는 만큼 읽을 부분이 줄어드는 것이 너무 아까운 작품이었습니다. 하나 둘 쌓아올리기 시작한 이야기는 결말 부분에서 다 큰 어른이 전철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비슷한 연령대의 인물들의 인생에 대한 공감이랄지, 애잔함 이랄지 복잡한 기분이 됐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조금 울고 난 것 같은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이토록 사랑받는 아들이 또 있을까 - P71

만일 집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면, 건축가는 신도, 악마도 될 수 있으리라.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건 인간이라는 사실을. 센신테이가, 그 소박한 공간이 가르쳐주었는지도 모른다. - P187

눈 앞에 펼쳐진 공간에서는 두려움도, 불안도, 분노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존재하는 건 의지뿐이었다. ‘남기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서 이 공간은 70년 가까이 ‘남겨진’ 것이다. - P243

어느 그림이 떨어진다거나 최상급의 그림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진부한 세상이 아니었다. 모두가 무명의 그림이었으며, 모두가 똑같이 명화의 반열에 놓였다. - P2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