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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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있어?’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 생각했습니다.
작가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라서 주인공의 인생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짐작도 했습니다.

 

 '우리 집이 풍비박산 난 건 오빠 자자가 영성체를 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집어 던진 무거운 미사 경전이
-중략-
장식장의 도자기 인형들을 박살 냈을 때부터였다.(p.11)'

라는 도입부분부터 아주 극적인 전개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큰 사건 외에 이들의 변화는 더할 수 없이 잔잔하게 진행되어갑니다. 
술술 읽히는 문장과 이야기가 전개 될수록 가슴이 꽉 막혀왔습니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칭호는 '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 오멜로라가 아니던가.(p.75)'
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의 힘은 막강합니다. 반항이란 건 꿈도 꾸지못할 만큼 말입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 이들을 방문한 이오페마 고모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맞습니다.

 

 '위층 식당에 불쑥 들어오는 고모를 보고 나는 당당한 조상( 祖上)을 상상했다. 집에서 만든 단지에 물을 떠 오기 위해 몇 킬로미터를 걷고, 아기들이 걷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고, 햇볕에 따뜻해진 숫돌에 간 대도로 전쟁에서 싸우는 조상님.'(105)

아버지의 '일과표' 없이 명령을 어기게 되는 상황에 강한 불안감을 느끼지만, 조금씩 다른 속도로 고모의 생활에 적응해가며 두 사람은 ‘특별한자유’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박탈당했던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법을 배우고 그 시간이 없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고모와 사촌들의 말 소리가 일상처럼 느껴질 때쯤 불안한 정치상황은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며칠 동안 더 주어진 자유 끝에 돌아온 체벌은 가혹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완벽해 보였던 아버지의 세계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나는 너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이 뛸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금 너희가 내 생각이 맞았음을 증명하지 않았냐고 했다. 
그 때 나는 이페오마 고모도 사촌들에게 똑같이 해왔음을 깨달았다.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해 그 애들이 뛰어넘어야 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반드시 막대를 넘으리라 믿으면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p.274)' 아마디 신부를 통해, 이오페마고모와 아이들을 통해 자자와 캄빌리는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캄빌리가 피신할 수 있었던 새로운 세상이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에 망연자실해 있을 무렵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상황이 급변합니다. 이제 가족 모두의 삶이 전체적으로 요동칩니다.
변화를 앞두고 있을 때마다 오빠 자자는 희망을 붙잡는 것 처럼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피고있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이제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p.364)

 

저는 아디치에의 글을 좋아합니다. 번역의 역할이 굉장히 크겠지만 말이죠.  
나이지리아 전통 복식이라던가 문화를 잘 몰라서 생경한 단어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내용에 잘 녹아 있어서 좋습니다. 
그 곳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눈에 보는 듯합니다. 
책을 받았을 때, 크기는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만 내용이 촘촘히 들어가 있어서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밥을 천천히 꼭꼭 씹어먹듯이 찬찬히 다 읽고 싶었습니다. 
에누구의 생활을 읽는 동안에는 말할 수 없이 답답하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분명히 학대인데, 그 와 중에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캄빌리의 마음이 너무 절박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건 틀린거야, 정신차려! 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또 경제적으로 가시밭길 같은 상황에서도 가족이 모두 함께 삶을 살아가는 고모 이오페마의 집 이야기는
한편으로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숨 쉴 공간'으로 보였습니다.
평소에 '이야기'를 거의 제대로 하지 못했던 캄발리의 변화가 섬세하게 전개되는 부분이 특히 좋았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쳐버리는 답답함에 공감이 가서 더 그렇기도 했습니다. 
늘 억눌려있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책하는 모습에서 한 걸음씩 걸어나오는 캄발리를 계속 응원하게 됩니다. 
어디든 한 사람이 사라진다고 갑자기 좋은 시기가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살아갈 시간은 지옥과 천당을 오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정말 담담히 풀어내고 있는 아디치에의 글이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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