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불빛의 집 / 한강
그날 우이동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틀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 지성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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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 나태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셔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 시집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2019)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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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의 며칠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줌이었다가
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 없이 찾아든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 소리있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리 고딜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머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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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를 묻고 산다는 것_김시천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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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서정홍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로 집을 짓다 보면
나무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나무처럼 한자리에서 뿌리내리고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원지에 사는 김도환 목수님 말씀을 듣고
시 한 편 썼습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농부들과 한마을에 살다 보면
농부들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농부처럼 한자리에서 뿌리내리고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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