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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수안이 행복하지 않은데 나 혼자 행복해진다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수안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얻는 행복의 평균이 있다면 나도 그 정도이길 바랐다. 혼자서 더 행복한 건 어쩐지 불안하고, 남의 행복에서 덜어온 듯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양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 하나가 많이 행복하면 다른 하나가 그만큼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타인의 행복이 커진다고 해서 내 행복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렸다.” - 이도우 [잠옷을 입으렴] 52쪽-53쪽
꿈속에서조차 타박타박 신작로 길 먼지 폴폴 날리며 건조하게 걷고 있을 것 만 같은,
찬기 어린 속내를 감추기 위해 더 깊디깊어진, 그래서 더 아련하기 만한 둘녕은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아빠에 손에 이끌려 이모 집에 맡겨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촌인 수안과 마주합니다. 너무나 일찍 철이 들어버린, 그래서 외려 어른들이 미안해질 정도로 마음이 성숙해져버린 속 깊은 아이 둘녕과 아이답지 않게 깊고 어두운 눈을 지닌 이종사촌 수안의 첫 만남은 시큰둥, 어색했지만, 아이들이 그렇듯 어느 한 꼭지점에서 둘은 단짝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공유합니다.
<잠옷을 입으렴>은 왠지 내 어린 시절 한 자락을 붙잡고 얘기하는 듯 합니다.
닳고 닳도록 읽었던 클로버문고, 계몽사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소년중앙, 어깨동무,,, 종이인형 놀이를 시작해 진화해 가는 종이인형 옷 만들기 놀이, 집안에 텐트치고 렌턴 켜놓고 책읽기, 짧은 생명선을 조금 더 길게 만들려 손바닥을 칼로 그었던(음,, 난 칼이 아니라 손톱으로 계속 그었던 듯 싶다. ^^;;;), 병약한 수안을 위해 둘녕이 만들어 준 만병통치약, 걸스카웃 캠프, 문학회 서클,,,, 두 소녀의 성장기는 나의 성장기를 돌아보게 만들며, 아스라한 그 추억의 한 페이지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한, 그녀를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메이게 합니다.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 오래 전 아주 추운 마을이 있었다고 해. 너무나 추워서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말이 얼음알갱이로 변해버려. 겨울 동안은 아무도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대. 어느 날 마을의 젊은 처녀가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그 역시 얼어버렸지. 이웃에 사는 부자가 처녀의 유언을 사고 싶어했고, 가난한 가족들은 그만 팔아버렸어. 이듬해 봄이 오니 허공에 떠돌던 말들이 녹아 메아리치며 들려오기 시작했데, 봄 내내 그 울림을 듣는 일은 정말 아득했을 거야. 귀를 틀어막고 싶지 않았을까? 먼 곳에서 처녀의 연인이었던 청년이 돌아왔지만 이미 팔려버린 유언을 돌려받진 못했어. 그건 그냥, 사랑한다는 말이었는데,,,” - 111쪽
둘녕과 수안, 이모와 이모부, 둘녕과 아빠, 외할머니와 경이 이모, 수안과 승모, 둘녕과 충하,,,
모두가 얼어버린, 끝내 들려주지 못한,,,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사랑해.”
찬바람이 부는 듯, 하지만 가슴 속에선 몽글몽글,,, 따뜻한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느낌,
아련한 속삭임 같은 울림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둘녕과 수안을 만나면,
도르르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이 부끄럽지 않을 거예요.
“수안에게, 시화전 들렀어. 내게는 네가 쓴 시만 보였어. 정말이야.”
“사랑하는 고둘녕. 네가 스웨터를 짜고 있을 땐 나는 곁에서 같이 아늑해져.
넌 털실을 짜고 난 시간을 허비하지. 넌 물레를 돌릴 테고 난 딸기잼을 휘젓겠지.
축복할게. 내 사촌. 언제나 마법 같은 손길 지나기를. 수안.” - 380쪽
“북쪽보다 더 북쪽이고, 남쪽보다 더 남쪽인 곳,
수탉 풍향계가 가리키는 그 곳에서 웃고 있는 수안과 둘녕에게 미소를 보냅니다.
그럼, 이만 총총. - 스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