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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201쪽
김연수 작가의 신간 소식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미소년 같은 그 미소도 떠오르고 말이다.
표지,,, 왠지 영화 <연인>의 주인공 제인 마치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또렷한 눈으로 사랑하는 이를 응시하려는 듯한 앞모습이 아닌 표지 속 그녀의 다소곳한 뒷모습은 머뭇머뭇,,, 누군가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향하는 그녀의 마음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 연분홍빛 설레임, 하얀 파도의 부서짐,,, 살짝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그녀의 달달한 사랑 이야기일 줄만 알았다. 하지만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 심연을 건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는 날개, 그리고 진실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열일곱 살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생후 6개월 만에 미국 중산층 백인가정으로 입양된 '카밀라 포트만', 친구처럼 지냈던 양어머니인 앤이 죽고 난 뒤 양아버지 에릭으로 부터 유년시절 추억이 담긴 상자 6개를 전달받는다. 그리고 함께 사는 남자친구 유이치의 권유로 매일 아침마다 시간을 내 상자 속에 든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그에 얽힌 기억들을 노트에 적어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렇게 여섯 개의 상자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는 2010년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란 제목의 자전소설로 발간되고, 카밀라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을 지극히 객관적이고 건조한 시선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평론가와 기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책 출간 이후 자신의 뿌리를 찾는 논픽션을 쓰기 위해 한국을 향하게 된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에이전트에게 전화해 빈 공간을 채우는 논픽션을 제안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건 운명이 부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빈 잔은 채워지기를, 노래는 불려지기를, 편지는 전해지기를 갈망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돌아가고자 한다. 진짜 집으로, 나의 엄마에게로” 33쪽-34쪽
스스로의 삶을 지극히 객관적이고 건조한 시선의 바라본 그녀의 마음 속 울림이 시작된 것이다. 동백꽃 앞에서 아이(카밀라)를 안고 있는 17살의 소녀가 진남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는 걸 알게 된 카밀라는 진남여자고등학교로 갔지만 교장 신혜숙은 무언가를 숨기며 조급해하는 모습이고, 엄마인 정지은이 그녀의 친오빠인 정재성의 아이를 낳았다는 고로 카밀라는 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물론 신혜숙이 숨긴 진실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카밀라(정희재)는 생모 정지은의 고향인 남해안 소도시 진남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잃어버린 과거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어 나간다. 생모의 여고시절 도서반에서 만든 문집 '바다와 나비'를 통해 문학소녀였던 '정지은'을 만나고, 88년 여름의 어느 밤, 생모가 짧은 생애를 끝내고 투신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17살 미혼모 '정지은'을 마주한다. 하지만 생모 지은과 이어진 사람을 만날수록 그녀의 출생에 대한 진실은 미궁으로만 빠져 들어간다. 자신들의 상황에서 합리화한 기억들은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점점 카밀라이자 희재에 대한 진실은 점점 진실과 멀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었을 테지요.” 274쪽-275쪽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카밀라라는 이름이 붙은 미국 소녀에서, 동백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카밀라라는 이름을 얻게 된 입양아, 아이를 낳으면 ‘희재’라는 이름을 짓겠다던 열일곱 살 여고생 지은의 딸로,,,, 새로운 점들은 카밀라(희재)의 존재를 가변적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과거의 그 점들을 통제할 방법이 스스로에게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의 존재를 바꿔버려도 좋을 만큼 그 점들이 중요한가? 필연적인가? 진실은 과연 그토록 중요한가?
소설은 2012년을 중심으로 미국과 한국, 일본, 방글라데시와 1988년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한국 남해안 소도시 진남을 오가며 수많은 인물이 등장시킨다. 운동화 갑피를 만드는 부산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미싱을 돌리며 미국 유학 간 아들을 뒷바라지하다 업체의 부당해고 투쟁 끝에 병사한 늙은 어머니와 그녀를 기억하는 아들 '서 교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타워 크레인에 올라갔다 끝내 투신자살한 정지은(카밀라의 생모)의 아버지, 그를 향해 보낸 '호프(HOPE)' 모스 부호에 대한 기억을 지닌 '정지은',,, 그리고 이들의 기억과 증언은 편지와 사진, 라디오 사연, 다큐멘터리 영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진실로 접근하며 커다란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고,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점’이 ‘현재의 삶’에 닿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카밀라(희재)의 뿌리찾기를 통해 그녀의 엄마가 누구인가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로 추리가 넘어가며 이야기는 방대해지고, 심연을 건너 타인에게 가닿을 수 있는 날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관계에서 비롯될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과정을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책장을 덮기까지 숨이 가쁘지 않을까 싶다.
* 화자인 “나”는 단순히 “카밀라”로 생각하지 말지어다.
화자의 변동이 참으로 심하야,,, 조금은 헷갈릴 수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