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
요시다 아쓰히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따끈하고 뜨끗하고 푸근한 것들이 떠오르는 계절에 만난 [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
꼭 어느 한적한 프랑스 마을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지의 이곳은 가상의 마을 쓰키부네초,
“노면전차가 지나는 마을로 저녁이 내리고
샌드위치 가게 ‘트르와’에 불이 켜지면
사랑스러운 이웃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동화 같지 않은가? 거기다 음식이 등장한다. 나에게 이보다 사랑스러운 책은 없으리라.. ^^;;; <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는 가상의 마을 쓰키부네초를 배경으로 한 <회오리바람 식당의 밤>의 자매소설이란다. 음,, 아직 회오리바람식당의 밤은 읽지 못했지만,,, 책을 덮고난 순간 요시다 아쓰히로 작품, <회오리바람 식당의 밤>과 <레인코트를 입은 개>를 찾아봐야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건,, 이 작가의 작품이 맘에 들었단 얘기겠지?
신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액서사리로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창문 밖 엷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이 십자가를 부드럽게 떠받치고 있는 광경에 반해 방을 계약한 주인공 오리이씨,,, 우연히 시작된 필연은 지금부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음,, 본인은 그리 생각지 않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충분히 이해불가할 수도 있을 법한 청년 오리이씨, 좋아하는 영화는(그것도 아주 오래된) 반복해 보는 음,, 무려 26번이나 반복해 볼 정도로, 그것도 존재감 미약한 조연 여배우(마쓰하라 아오이)에 빠져 그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관엔 꼭 앉아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직장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던 청년 오리이씨가 쓰키부초네 마을에 정착한다. 음,,, 세상에 대한 욕심이 전무한, 그래서 시대로부터 뒤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랄까?
p41 예전의 시간은 지금보다 느긋하고 두터웠다. 그것을 ‘시간의 절약’이라는 미명 아래 아주 잘게 조각내버린 것이 오늘날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명의 다양한 이기가 문자 그대로 시간을 잘라내 일단 무언가를 단축하긴 했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잘라낸 것은 ‘느긋했던 시간’ 그 자체임이 분명하다..... 세상에는 시대에 뒤쳐진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나는 그런 사람을 종경하기 때문에 누나가 말하는 ‘세상’이 어찌 되었든, 그런 사람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어딘가에 존재했다.
뒤쳐져 있는 듯 보이지만,,, 그는 그 느긋하고 두터웠던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아무튼 샌드위치 가게 트르와(3이란 의미)의 샌드위치 맛에 반해, 안도씨의 권유로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고, 안도씨 샌드위치에 어울릴 만한 수프 만드는 일에 전력을 쏟게 된다. 무언가에 빠지면 거의 홀릭 수준이라고나 할까? 오리이씨는 새로운 수프 만드는 일에 전념하면서, 언젠가 영화관에서 마쓰하라 아오이를 닮은 초록 모자의 여인이 마시던 수프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수프 만드는 일과 함께 흐르는 시간에 느긋하게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소중함, 그리고 그들을 통해 사소해 잊고 있었던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하나씩 깨닫게 된다.
p44 안도씨는 늘 이런 식이다. 시대에 뒤떨어졌다기보다 예전의 느긋했던 시간 속에 의연하게 몸을 두고 있는 희귀한 사람으로 보였다. 다만 안도씨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주의나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느긋함이 존재했다.
p112 트르와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손님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서, 일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누군가’를 가능한 한 웃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일의 정체가 아닐까. 어떤 직종이든 그것이 일이라고 불리면, 그것은 언제나 사람의 미소를 목표로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샌드위치와 수프를 만들어 건네는 것이 여러 사람의 미소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 귀중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p123 "이 빵 뭐지?”
“그렇지. 이상한 빵이지?”
“처음 먹을 때보다 다음 먹을 때가 더 맛있네.”
“그렇다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정말 맛있는 거란 그런 것 같아.”
누나는 그런 식으로 이따금 이상한 지점에서 자기 나름의 철칙을 선보였다.
소설은,,, 자극적이지 않고 따뜻한 수프 한 그릇 같은 포근함을 지니고 있다.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만, 세상에 대한 욕심 없이 서로에게 기대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채,,, 느긋한 일상을 차분히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바라보자면 밋밋한 얘기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책망을 스스로에게 건넬지도 모르겠다. 조마조마, 허겁지겁, 허둥지둥,,, 세상을 제대로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은 천천히, 여유롭게, 뭉근하게,,,가 정답이란 사실을 따뜻한 수프 한 그릇과 함께 제대로 대접받은 느낌이었달까?
p220 이름 없는 수프 만드는 방법
· 기대를 하지 말 것.
· 어떤 수프가 완성될지는 냄비밖에 모른다.
· 냄비는 위대하다.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깨끗이 닦는다. 그러나 기대는 적당히
· 잘 닦은 냄비는 한동안 비어있는 채로 놔둔다.
· 빈 냄비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적당히 기대한다.
· 그러나 모든 것은 냄비에 맡긴다. 그러면 냄비가 만들어준다.
·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고 그 때 거기에 있는 것을 냄비에 집어넣는다.
· 뭐든지 상관없지만 좋아하는 감자는 넣는 것이 좋다.
· 물론 감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것만큼은 빠트릴 수 없다 하는 것을 뭐든지 한 가지 넣는다.
·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켜면 잠시 후에 김이 난다.
냄비에서 올라오는 김 역시 위대하다.
· 환기시키는 것을 잊지 말 것. 창문을 열고 내친김에 바깥 상황을 본다.
· 날씨가 맑든, 흐리든, 비가 오든 수프는 어떤 하늘과도 잘 어울린다.
· 전부 위대하다.
· 잠시 후 감자가 익어 흐물흐물해진다.
· 감자 이외의 재료도 그 사이에 흐물거리기 시작한다.
· 흐물흐물해져서 재료들의 구분이 없어지면 그걸로 완성
· 사실 완성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됐다.
· 따뜻할 때 먹는다.
· 그리고 식기 전에 이웃에게도.
· 아니면 생각나는 사람에게, 귀찮으면 생각하는 것만으로 좋다.
· 이것을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라고 한다.
· 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 그 훈련을 위해 수프를 만든다-는 것이 원칙
· 여기에 쓴 것을 전부 잊고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 어쨌든,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