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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치여자 ㅣ NFF (New Face of Fiction)
사비나 베르만 지음, 엄지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 <나, 참치여자>의 원제이다.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불완전한 사람들>에 이어 NFF(NEW FACE OF FICTION) 세 번째 소설이라는데,,, 제목 참 독특하구나. 사실,,, 찰스 유의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을 출간했던 NFF라 <나, 참치여자> 역시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음이다. 접하기 힘든 멕시코 소설이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중남미 문학의 소설들은 다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듬과 동시에 사회성 짙은 풍자로 그 매력을 충분히 풍기고 있음이니 말이다.
현대 멕시코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사비나 베르만,,, 극작가, 시인, 각본가, 영화제작자, TV 토크쇼 진행자, 칼럼니스트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발산하고 있던 그녀가 2010년, 소설가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추가한 작품이 바로 <나, 참치여자>이다. 역시나 중남미 문학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고 있음이었다.
주인공 '카렌 니에토'은 자폐아로 한 분야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고기능성 자폐증을 앓고 있는 인물이다. 짐승처럼 내버려진 채 키워진 카렌은 엄마가 죽고 난 뒤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 마스틀란(멕시코 최대 어항)에 도착한 이사벨 이모를 만나게 된다. 바닷물과 참치 피가 뒤섞인 구역질나는 공장과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커다란 흉터를 갖고 짐승처럼 살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의 소녀,,, 이사벨 이모는 그 아이를 사람답게 만드는 일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서 그녀의 ‘독특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케 된다.
p 21 제일 먼저 이모는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 나. 나. 까까머리였지만 스타킹에 샌들까지, 갖출 건 모두 갖춘 채, 바다를 마주보고 목이 터져라 나를 외쳐대던 나는 1978년 8월 21일,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이모의 등장과 함께 카렌은 ‘나’ 그리고 ‘세상’과 대면하게 된다.
소설에는 유난히 ‘나’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그녀의 언어습관은 소설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등장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대한 깊은 반감적 형태로 드러난다. 익히 알고 있던 데카르트의 명언을 이리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생각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언어로 사고하지 못하는 존재들 사이에 그어진, 건널 수 없는 금을 지우려 노력함으로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될 수 있음을 정립시켜 나간다고나 할까?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카렌은, 이사벨 이모의 포기하지 않은 부단한 노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케 된다. 물론 “스탠더드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성년의 나이가 된 카렌은 지적능력이나 유사한 개념이나 이미지를 서로 연결하는 것, 어떤 이미지에 주관적 세계를 투사하는 능력은 유치원 수준이었지만 공간지각 능력과 사물에 대한 집중력, 주의력 지속성, 공간조직능력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능력으로 갖고 있는 그녀를 정확히 파악한 이사벨 이모는 얘기한다.
p 246 네 지능의 90% 정도는 저능아와 백치 사이에 걸쳐 있어. 하지만 나머지 10%의 능력은 최고, 아니 그 이상의 수준이라고 보면 돼.... 지금 화면처럼 네 장애를 표시하는 90%의 빨간 숫자는 앞으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고 파란색으로 표시된 10%, 그러니까 네가 지닌 뛰어난 능력에 모든 걸 걸어보자꾸나. 어때?
그렇게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는 카렌은 미국 유학을 거쳐 이사벨 이모와 함께 참치회사를 경영하며, 독특한 어획 방식(돌고래에게 해가 되지 않게 참치를 포획하고 인도적으로 도축하는)을 개발하고, 사업가인 굴드를 만나 동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며, 그녀만의 독특한, 스탠더드:표준의, 전형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카렌은 우리에게 스탠더드한 인간들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잘못돼 있음을 직설적인 어법으로 질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생각과 모든 존재함은 인간들 위주로만 생각하고, 인간이 우위에 있음이 당연 시 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스탠더드함이 결코 스탠더드함이 아닌 어쩌면,, 가장 독특함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p 362 카렌, 넌 말이다. 이모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넌 말하는 동물과 말하지 않는 동물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해. 넌 현실과는 또 다른 계약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돌연변이 종이니까 말이야.
흥미롭고 매력적인, 게다가 참치처럼 팔딱이는 신선함과 함께, 환경과 인간의 지배적이면서도 권위적인 시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적인 울림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는 소설이었다. 사실,, 쉽고 흥미롭게 읽자면 얼마든지, 어렵고도 깊게 사색케 만들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 독특한 능력 그 자체인 카렌 니에토, 그녀가 ‘나’를 찾아가는 동화 같은 이야기의 여운은 [아주 가끔씩,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느릿느릿 어렵사리]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p 357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느껴졌지만, 또한 가장 조용하게 보내던 그때, 이모와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데만 전념했다. 살아간다는 것. 내게 있어서 그것은 조급한 마음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긴장을 풀고 심장이 원래의 리듬대로 뛰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 덥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태양의 열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설령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해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 그리고 밤이 오고 온 세상에 어둠에 잠겨 잠이 오면 무조건 몸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세상 사물들도 어둠 속에서 쉬어야 할 테니까.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또 봐야 한다.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당장 내일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