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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ㅣ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중독(intoxication, addiction)
의학적으로 보면
첫째, 독으로 지칭되는 유해 물질이 신체에 노출됐을 때 나타나는 증상,,,
말 그대로 화학물질이나 중금속, 복어나 버섯 독,,, 같은 자의가 아닌 중독을 말한다.
둘째, 알코올, 마약과 같은 약물 남용에 의한 정신적인 중독,,,
이것이 바로 이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에서 문제되는
중독, addiction, 의존증인 것이다.
일종의 습관적 중독으로 갈망이나 탐닉에 의해 어떠한 물질을 찾고
또 복용을 중단하지 못해 빈번히 사용함에 따라 내성이 생기고
점차 용량이 증가됨에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해쳐지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 우리들도 어느 정도 중독성 있는 물질들을 복용하고는 있다.
뭐,, 예를 들면 술이라든지, 담배, 커피나 차,,,도
다 이에 해당하는 남용물질이라 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음,, 심각한 인터넷 중독이나 쇼핑 중독도,,,
이 두 번째 습관적 중독에 해당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마약류나 환각제, 수면제 등에 의한 문제들보다는 좀 덜하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집착하고 중독돼 있는 뭔가에 대해 인정하기란 쉽진 않다.
향 정신정 물질이라면 특히나 더 말이다.
p9 실제로 자신의 도덕적 타락이나 상처를 거리낌 없이 남들 눈앞에 드러내어, 시간의 흐름이나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너그러움이 그 보기 흉한 상처 위에 씌워주었을지도 모르는
‘고상한 휘장’을 벗겨버리는 사람만큼 영국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의 토머스 드 퀸시는
자신의 아편중독,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아편의 쾌락과 고통, 아편의 남용에 따른 무서움,
그리고 아편을 줄이려는 노력을 솔직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으로 고백하고 있다.
p11 도덕적 결함과 정신적 고통이 반드시 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그 어두운 동맹자의 그림자에 가까이 다가가느냐 아니면 거기서 멀어지느냐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자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냐, 알려진 것이든 은밀한 것이든 정상 참작의 여지는 얼마나 되느냐, 처음부터 죄의 유혹이 강했느냐, 그 유혹에 저항하려는 노력과 실제로 저항하는 행위는 마지막까지 진지했느냐에 비례한다.
p 13 나는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인정한다 해도, 고백하겠다는 지금의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고백을 통해 모든 계층의 아편쟁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04년 치통을 앓던 그에게 친구가 아편을 권했고
비 내리는 음산한 일요일 오후 아편딩크(아편을 알코올에 녹인 것)를 구입하면서
1페니만 주면 살 수 있는 행복의 비밀을 발견해 버린다.
물론 당시엔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을 발표하기 전은 물론이고 발표할 당시에도 아편은 금지된 약물은 아니었다. 드 퀸시도 쓰고 있듯이 어느 약방에서나 팔고 있었고 술보다 값이 쌌다. 요즘 사람들이 진통제를 복용하듯 19세기 사람들도 아편을 복용했고 어른 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밤중에 울거나 경기를 일으키면 아편 딩크를 먹였던 시대였다.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도 어릴 적 아편을 수면제 대신 복용했다고 한다. 물론 드 퀸시의 경우 진통제가 쾌락적 자극제로 변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책의 내용은
1부에서는 아편을 복용하기까지 드 퀸시가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서술하고 있고
2부에서는 아편의 쾌락과 고통, 그리고 아편을 끊기 위한 노력이 서술돼 있다.
하지만,,, 아편이란 주제로 교리를 읊어대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아편에 대한 쾌락이 그의 생을 지배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케 된다.
p 84 당시에는 아편이 얼마나 무의미한 소리였던가!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진지하게 내 심금을 울리는가!
얼마나 슬프고도 행복한 기억들이 가슴 떨리는 진동인가!
p 89 독자들이여. ‘나의 책임으로’ 장담하건대, 어느 분량의 아편도 중독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으킬 수도 없다. 아편딩크는 충분히 복용할 수만 있다면 확실히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럴까? 아편딩크에는 아편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표준 강도의 알코올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언하거니와, 생아편은 알코올이 만들어낸 것과 비슷한 신체 상태를 절대 만들어낼 수 없다. 단지 효과의 ‘정도’만 다른 것이 아니라 효과의 ‘종류’도 전혀 다르고, 효과의 양만이 아니라 효과의 질에서도 아편은 알코올과 전혀 다르다. 포도주가 주는 쾌락은 언제나 고조되어 고비에 이른 뒤에는 점점 약해진다. 아편이 주는 쾌락은 일단 생겨나면 여덟 시간 내지 열 시간 동안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의학의 전문용어를 빌리면, 전자는 급성 쾌락이고 후자는 만성쾌락이다. 전자는 확 타오르는 불꽃이고, 후자는 꾸준히 한결같은 빛과 열을 내는 백열이다. 하지만 주요한 차이점은, 포도주가 정신 기능을 혼란시키는 반면 아편은 (적절히 복용하면) 정신 기능에 완벽한 질서와 규율과 조화를 가져온다는 데 있다. 포도주는 인간의 냉정함을 빼앗지만, 아편은 냉정함을 크게 활성화한다. 포도주는 판단력을 어지럽히고 흐리게 하며, 술을 마시는 사람의 경멸과 존경, 사랑과 증오에 초자연적 광채를 주고 그것들을 생생하게 강화한다. 반대로 아편은 능동적이거나수동적인 모든 정신 기능에 평온과 균형을 전달한다. 일반적으로 기질과 도덕심에 대해 말하면,아편은 판단력을 발휘하는 데 유리하고 원시시대나 노아의 홍수 이전의 건강한 신체 구조에는 아마 항상 수반될 그 필수불가결한 온기를 준다.
아편 정통파 교리의 유일한 신자, 토마스 드 퀸시의 주장이다.
하지만,,,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아편을 탐미, 찬미하던 드 퀸시도
결국 아편을 끊으려 노력했다는 사실,
물론,,, 음,,, 진정,,, 본인 스스로 끊으셨는지는 확인할 바 없지만,,,
어찌됐든 영국인 낭만주의자의 아편 중독이란 지독한 일탈은
왠지 아편에 대한 찬미에 점철된 듯한 느낌이다.
아편에 대한 쾌락의 장을 더 흥미롭게 읽어 그런가?
뭐,,, 물론 저렇게 아편에 대해 찬미하는 저자 드 퀸시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