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려는 말은 독고독락
낸시 풀다 지음, 백초윤 그림, 정소연 옮김 / 사계절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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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길'이란 사람 키 정도되는 길이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깊이를 알 수 없을 것 같은 물속은 어찌어찌 끝을 알 수 있지만 그보다 짧은 사람의 마음은 끝을 알기가 쉽지 않다는 옛 속담이 요즘같은 소통의 부재와 곤란의 시대에 더 와닿는다.

미국의 SF작가인 낸시 풀다의 '내가 하려는 말은' 소설집은 '시간적 자폐'를 앓는 한나의 이야기 '움직임'과 치매를 앓는 엘리엇의 이야기 '다시, 기억' 두 단편으로 이루어져있다. 한 권의 책 읽기가 쉽지 않은 요즘, 누구나 앉은 자리에서 완독할 만한 아주 짧은 길이의 단편이니 도전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용도 흥미로워서 한번 잡으면 그 자리에서 뚝딱 해치울 수 있으니 말이다. 두 편의 소설 모두 순식간에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었지만 그 중에서도 첫번째 작품 '움직임'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주인공 한나는 '시간적 자폐'라는 병명을 앓고 있으며 시냅스 이식이라는 신 기술로 치료를 할까말까의 기로에 놓여있다. 기술을 신봉하는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시도하여 아이가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어머니는 기술에 대한 불신으로 아직 시험단계인 시술에 대해 염려가 더 크기에 기존의 치료를 계속 하기를 원하고 있다. 당사자인 한나의 생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입밖으로 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한나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서술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치료나 시술이 아닌것같다는 생각이 커진다.

유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아래 분자 수준에서는 유리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 그 속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일어날 변화이다...... 그것들이 현미경 없이도 알아볼 만큼 변하기 전에 나도, 내 친척들도, 그들의 후손도 모두 죽을 것 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14-15쪽

한나의 시간은 엄마, 아빠의 시간과는 다른 것일 뿐,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나가 자유로운 순간은 익숙한 발레 슈즈를 신고 자신만의 발화를 몸으로 표현하는 순간인 것 같다.

지인의 아들이 중3이 되면서 등교거부문제가 발생하여 무척 애를 먹었던 순간이 있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학원이든 공부든 곧잘 따라가던 아들이었기에 이런 변화가 엄마에게는 너무 큰 상처가 되었다. 지인은 아들을 상담센터에도 데리고 가고 여행도 보내고 주말마다 이벤트를 마련하여 현장체험학습까지 모조리 써가며 졸업으로 이끌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상담선생님은 아이의 기질이 야스퍼거 증후군과 유사하다고 하셨고 찾아보니 그동안 아이가 유별나서 그렇다고 넘겼던 행동의 패턴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엄마도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려놓을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정한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모습이 존재하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장애와 비장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약자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정한 사회적 기준이 보호망이 되기도 하고 넘기 힘든 허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세상을 조금 더 살아보니 알게되었다. 남의 자식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은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 속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옛 사람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지금도 매일 경험하는 중이다. 겉보기에는 말짱해보여도 속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각자가 품고있는 고민과 걱정의 크기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한나가 마지막에 내뱉은 "새 신발은 갖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 속에서 아이가 가진 내면의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세상과 맞서고 있는 아이에게 치료라는 이름으로 덧댄 시간들이 어른의 욕심이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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