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시간은 엄마, 아빠의 시간과는 다른 것일 뿐,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나가 자유로운 순간은 익숙한 발레 슈즈를 신고 자신만의 발화를 몸으로 표현하는 순간인 것 같다.
지인의 아들이 중3이 되면서 등교거부문제가 발생하여 무척 애를 먹었던 순간이 있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학원이든 공부든 곧잘 따라가던 아들이었기에 이런 변화가 엄마에게는 너무 큰 상처가 되었다. 지인은 아들을 상담센터에도 데리고 가고 여행도 보내고 주말마다 이벤트를 마련하여 현장체험학습까지 모조리 써가며 졸업으로 이끌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상담선생님은 아이의 기질이 야스퍼거 증후군과 유사하다고 하셨고 찾아보니 그동안 아이가 유별나서 그렇다고 넘겼던 행동의 패턴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엄마도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려놓을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정한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모습이 존재하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장애와 비장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약자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정한 사회적 기준이 보호망이 되기도 하고 넘기 힘든 허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세상을 조금 더 살아보니 알게되었다. 남의 자식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은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 속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옛 사람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지금도 매일 경험하는 중이다. 겉보기에는 말짱해보여도 속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각자가 품고있는 고민과 걱정의 크기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한나가 마지막에 내뱉은 "새 신발은 갖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 속에서 아이가 가진 내면의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세상과 맞서고 있는 아이에게 치료라는 이름으로 덧댄 시간들이 어른의 욕심이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