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크 챕터
위니 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한길사 / 2018년 3월
평점 :
'다크 챕터(Dark Chapter)'는 번역하면서 원제목을 그대로 썼다. 'Dark Chapter'를 풀이하면 '어두운 시기'라는 뜻이다. 벌써 제목만 대하더라도 우울하다.
책의 앞표지 전체를 차지하는 배경은 인적이 드문 어두운 숲길을 홀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비춰준다. 왠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음침한 느낌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던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왼쪽 아래에 한 문장으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4월의 그날 벨파스트 힐즈에서 그녀에게 가해진 그의 폭력은 그녀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꿨다'라는 문장이 있다. 책의 배경에 등장하는 숲길이 벨파스트 힐즈인가 보다. 그렇다면 그녀와 그를 둘러싼 폭력사건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책의 뒤표지는 '성폭행 트라우마를 극복해낸 위니 리의 자전적 소설'이란 글로 시작한다. 벨파스트 힐즈에서 발생한 그에 의한 폭력은 성폭행이었다. 저자 위니 리가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폭행 피해자였던 그녀는 '성폭행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회복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최근 우리나라에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2차 가해를 받을 두려움에 떨거나 혹은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기 힘들어서 오랜 세월 신고도 못한 채 숨죽이면서 지내야했다. 때맞춰 성폭행을 당한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출간되어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책의 저자 위니 리는 작가이자 영화제작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예술과 토론을 통해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활동을 펼치는 단체 클리어 라인스 디렉터 페스티벌의 공동설립자다. 자신의 성폭행에 바탕을 둔 첫 장편소설 '다크 챕터'를 썼다. 이 소설은 가디언이 '2017년 독자가 뽑은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었다.
책을 펼치자 '모든 피해자와 생존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를 위해' 라는 헌사가 있다. '우리'라는 단어에서 작가와 미지의 독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결속력이 생긴다.
책의 차례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외한 나머지 프롤로그, 제 1장부터 5장,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소제목이 없다. 작가가 친절하게 소제목을 달아줬더라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훑어볼 수 있으련만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그래도 내용이 지루하진 않겠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자가 책을 쓴 의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녀 자신이 겪은 성폭행과 그 이후의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낱낱이 드러내는 건 쉽지 않았지만, 정작 부끄러워할 사람은 성폭행 가해자다. 우리는 성폭행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한편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성범죄는 개인의 삶에 충격을 주지만 피해자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치유하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 저자의 말이야말로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me too)이자 위드유(with you)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여전히 자신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시간을 되돌려서 예전의 나 자신에게 소리 질러 경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나간 역사를 되돌이킬 수 없듯이 그녀의 과거는 과거 그대로 머물러 있다.
제 1장부터 5장까지 그녀가 겪었던 성폭행 사건이 전개된다. 1장의 도입부에선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듯 어린시절로 거슬러간다. 이야기는 피해자 비비안의 시각과 가해자 조니의 시각을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그래서 가끔 일간지를 장식하고 있을 법한 뻔한 성폭행 사건으로 흐르지 않는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 여러 대의 카메라로 남녀 주인공의 시선을 쫓아가듯이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피해자 비비안과 가해자 조니의 시각을 동시에 보여준다. 독자는 비비안의 입장이었다가 다시 조니의 입장으로 쉬지 않고 두 인물을 오고 가면서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
비비안과 조니는 가정환경부터 큰 차이가 있다. 비비안의 부모님은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자녀의 공부에 관심이 많다. 비비안도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다. 반면에 조니의 부모님은 유랑민 출신으로 아버지의 잦은 폭력에 어머니는 딸 셋을 데리고 이혼한다. 조니는 수시로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는 형과 함께 캐러밴에서 살고 있다.
이쯤에서 비비안과 조니의 성장환경을 알 수 있다. 비비안의 입장에서 서술한 사건과 조니의 입장에서 서술한 사건이 전개된다. 그래서일까? 독자는 줄곧 성폭행 피해자인 비비안의 편에서 그녀가 당했던 성폭행 사건을 안타까워하지만, 때론 가해자 조니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비비안이 성폭행 사건을 당한 뒤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경찰에 신고한 뒤 재판, 판결에 이를 때까지 그녀는 거의 일 년 이상 성폭행 피해자로 지내야했다. 경찰서에서의 진술, 몸의 여기저기에 난 멍이나 상처자국을 보여주고 증거물로 남기기 위한 사진 촬영, 정신과에서의 심리 상담,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진술 등의 과정은 그녀가 감당하기에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버텨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 혹은 밤늦게 술 마시면서 혹은 혼자 돌아다니면서 라는 갖가지 이유를 대었다. 피해자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렇다는 것으로 본질을 외면했다. '다크 챕터'의 저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그릇된 태도를 꼬집고 있다.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장편소설이어서 책의 분량이 많지만 작가의 글을 풀어내는 유련한 솜씨에 빠져든다. 성폭행 사건의 전말은 간단하다. 그런데 작가의 손끝에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듯 독자들은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드라마로 재구성한 듯 흥미진진하다.
우리 사회에 미투 운동이 불고 있다. '다크 챕터'는 미투 운동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미투 운동의 사례들 중 하나다.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책을 읽어본다면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질 것이다.
https://m.blog.naver.com/geowins1/221241291631